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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두구의 저주 - 지구 위기와 서구 제국주의
아미타브 고시 지음, 김홍옥 옮김 / 에코리브르 / 2022년 12월
평점 :
지구를 침묵시키고 정복한 프로젝트가 북·남미에서보다 더 많은 폭력을 촉발한 곳은 없다. 그러니만큼 아메리카 인디언과 아프리카계 미국인 전통 속에서 생기론·반기계론적 정치체제를 가장 또렷하게 볼 수 있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유럽인 정복 뒤 남미에서 이어진 수많은 봉기 중 상당수는 인간과 비인간 사이 관계에 대한 믿음을 지닌 샤먼들이 주도했다.(328쪽)
북·남미에서 흑인이 일으킨 반노예제 저항은 비단 통상적 정치저항에 그치지 않았다. 형이상학적 저항이기도 했다. 옛 형이상학을 새로이 재창조함으로써 백인 정복자가 강제하는 세계에 대한 근원적 개념에 이의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그렇다.(329쪽)
북·남미 토착민 저항은 더 끈질기게 생기론을 고수했다. 이는 “우리 모든 친족(relations)”-곧, 산·강·동식물, 그리고 그 땅 정령을 포함한 비인간 친족 스펙트럼 전체-을 보호하기 위해 가족 본성을 정면에 내세우는 윤리에 오랫동안 터잡아온 전통이었다.(330쪽)
생기론은 생명 현상을 무기적 자연법칙 따라 설명하는 기계론에 반대하는 생명론이다. 무생물계 현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생명 현상은 물리ㆍ화학적 힘이 아닌 독특한 생명력 내지는 활력(vital force)에서 비롯한다고 주장한다.(철학 사전)
기계론에 반대하는 생기론은 당연히 제국주의에도 반대한다. 반대는 정치저항을 넘어 형이상학적 저항에 이른다. 백인 정복자가 강제하는 세계에 대한 근원적 개념에 이의를 제기한다. “우리 모든 친족(relations)”-곧, 산·강·동식물, 그리고 그 땅 정령을 포함한 비인간 친족 스펙트럼 전체-을 보호하기 위해 가족 본성을 정면에 내세우는 윤리에 오랫동안 터잡아온 옛 형이상학을 새로이 재창조함으로써다. 재창조에는 인간과 비인간 사이 관계에 대한 믿음을 지닌 샤먼이 주도적으로 참여한다.
샤먼. 그렇다. 우리 시대에 절실히 필요한 존재가 바로 샤먼이다. 샤먼은 메시아가 아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일은 더 이상 인류 과제가 아니다. 부역자임을 자각한 사람 모두가 샤먼이 된다. 서로서로 깨워 일어난다. 나란히 나란히 행진한다. 비인간 전체, 우리 풍경 향해 두 팔 벌리고 나아간다. 그들 또한 두 팔 벌리고 마주 달려온다. 꿈이 아니어서 우리는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