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두구의 저주 - 지구 위기와 서구 제국주의
아미타브 고시 지음, 김홍옥 옮김 / 에코리브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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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가 꽤 지나도록 서구 마녀사냥은 암흑시대 잔재로, 계몽주의와 인본주의 승리로 이어진 진보 궤적에서 불거진 어떤 일탈로 여겨졌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는 사실과 거리가 멀다. 중세 시대 유럽에서 대규모 마녀사냥이 일어난 적은 없다. 오히려 근대 초기 특유한 현상이었으며,···절대주의 국가 형성·새로운 형태 가부장제 강화·미주대륙 식민화 같은 여러 요인이 어우러져 전개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교육받은 유럽 엘리트 사이에서 마녀론 같은 새로운 사고 형태가 등장하기 시작한 데에는 한꺼번에 몰아닥친 변화가 결정적인 몫을 차지했다.···마녀론 신봉은 민중 아닌 지배 엘리트 전유물이었다.···강도 높은 사냥이 일어나도록 하려면 지배 엘리트 집단이 그 범죄가 최고 수준으로, 대규모로, 음모적 방식으로 행해졌다고 믿게 할 필요가 있었다.···

  ‘음모라는 단어는 오늘날 인간 공모자 사이 계약을 뜻한다. 17세기에는 마녀론 맥락에서 마녀와 악마 간 계약을 지칭하는 데 쓰였다. 마녀재판은 전형적으로 그 계약을 캐내는 데 초점을 맞추었고,···그 계약에 대한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고문했다.···

  ‘말살은 마녀론 맥락에 으레 등장하는 단어다. 이 또한 당시 진행 중이던 식민화 과정과 연관되어 있다. 부족 전체가 마녀일 수 있으므로 깡그리 제거해야 한다고 믿게 된 일이 바로 북·남미에서 먼저 일어났기 때문이다.(351~353)

 

마침내 제국주의 파노라마 마지막 풍경에 이르렀다. 제국주의 본성이 핵심을 드러내는 장면이라 아니할 수 없다. 말살 표적으로 삼은 대상이 제국 인간이기 때문이다. 비인간도 아니고 다른 인종도 아닌 제국 시민, 그러니까 유럽 백인을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깡그리 제거해야 한다고 믿게 된 대상에 집어넣었으므로 이제 그 이상 범주는 없다. 제국주의 본성이 가부장주의라는 내밀한 진실을 표명한 셈이다.

 

누군가 말했다: 가장 성공한 이데올로기는 가부장주의다. 살해와 수탈로 얼룩진 인간사에서 허다히 명멸한 이데올로기, 그 완결판으로 보이는 마침내 제국주의조차 가부장주의 버전 가운데 하나라면 과연 옳은 말이다. 백인·성인·남성·지배 엘리트는 그러면 왜 이런 살해수탈체제를 만들 수밖에 없었을까? 이 문제를 푸는 열쇠 말 두 개가 있다: 악마와 음모.

 

악마는 공포·불안을 인격화한 존재다. 실은 가부장주의자 자신을 투사한 허구다. 음모는 악마와 맺는 계약으로 공포·불안을 증폭시키는 계략이다. 실은 가부장주의자 자기 심리를 투사한 실재다. 이 투사 교차점에 마녀, 곧 악마와 거래한다고 죄를 뒤집어씌운 여성을 잡아다 앉히면 마녀재판 피고석이 찬다. 피고는 원고에게 있을 수 없는 근원적 생명력으로 절대 모멸감을 불러일으킨다. 모멸감이 말살을 충동한다. 이 시나리오 영감은 북·남미 말살 전쟁에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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