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두구의 저주 - 지구 위기와 서구 제국주의
아미타브 고시 지음, 김홍옥 옮김 / 에코리브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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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이전에 쓰인 모든 역사 중 95%5개 역사적 국가, 즉 영국·프랑스·미국·이탈리아 그리고 여러 독일 국가(현재 독일의 역사적 뿌리를 이루는 여러 국가를 지칭한다-옮긴이) 역사다. 나머지 5%는 주로 그보다 덜 강력한 유럽 몇 나라, 즉 네덜란드·스웨덴·에스파냐 역사다.”(이매뉴얼 월러스틴)

 

지금까지도 미국 대학의 역사학과에서 유럽과 북미 이외 지역에 대한 역사 연구 비중은 17%에 지나지 않는다.(260)



미국 명문대학 하면 보통 아이비리그를 떠올리지만, 실제 미국 상류층에서는 작은 규모 명문 사립대, 특히 LAC(liberal arts college)에 대한 선호도가 더 높다는 말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St John’s College. 한국 사람으로서는 당최 이해할 수 없는 학교다. 강의 듣고 시험 봐서 학점을 이수하지 않고 4년 동안 고강도 독서 토론을 견뎌 내야 졸업시킨다. 중도 포기자가 속출한단다. 몇 해 전 나는 우연히 그 학교가 제시한 100대 고전 목록을 본 적이 있다. 그 가운데 동양 고전은 단 한 권도 없었다.

 

서구 제국 시민, 특히 앵글로아메리칸은 다른 인종에게도 역사가 존재하고 따라서 그 결실로서 고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설혹 인정한다 해도 구태여 소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이 일방 도로는 그들만이 아니라 식민화된 다른 인종도 그대로 수직 관통한다. 수많은 비서구 인재들이 유학 가서 하는 짓이 바로 서구 고전 읽기다. 제 땅에서조차 행세하려면 제 고전 아닌 서구 고전을 읽어야 하니까. 훈장 달고 돌아와 좋은 밥그릇 차지한 특권층 부역자는 애써 학문과 진리를 들먹인다.

 

저들이 아는 헤겔 변증법과 저들이 모르는 원효 화쟁 사이에서 한국 역사는 옛날얘기로 미끄러진다. 제국이 역사를 교양으로 끈덕지게 가르치는 동안 한국은 역사를 예능으로 토막 내 희화한다. 중첩 식민지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인 한국이 오히려 제국에 비해 역사 교육 시간이 훨씬 적을 뿐 아니라, 근대 이전 유구한 역사를 노골적으로 누락시키고 있다. 특권층 부역자 지배집단, 특히 제국 유학파가 그 배후라는 사실을 몰라도 될 사람은 없다. 그러나 대부분 모른다. 알면 국수주의자 취급당한다.

 

현대인이 가장 무서워하는 양대 질환이 치매와 우울증이다. 치매는 자기 정체성, 그러니까 그 역사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참혹하다. 우울증은 자기 부정에 빠져버리기 때문에 참혹하다. 개인이 이러할진대 하물며 공동체 전체가 역사를 잃어버리고 자기 부정으로 침윤된다면 얼마나 참담한 일인가. 지금 나는 우려를 표하고 있지 않다. 제국 유학파 뉴라이트 핵심 인물 아들로서 일본을 선망해온 검사 출신 최고 권력자가 제 역사를 팽개치고 제 백성을 부정하는 현실, 그 한가운데에 섰음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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