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두구의 저주 - 지구 위기와 서구 제국주의
아미타브 고시 지음, 김홍옥 옮김 / 에코리브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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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진보가 다른 종들, 그리고 인간 대부분에 대한 말살을 수반한다는 개념은···19세기 말 자유주의 또는 진보 지식인에게 상식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특히 어쩌다가 국가 정책을 통해 자기 소신과 이론을 현실 세계에 구현할 수 있는 권력자들에게 해당한다.

  이 개념 밑바탕에는···지구를 인간이 좀 더 높은 단계 존재로 비상하려면 벗어던져야 하는 짐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이 깔려 있다.···실제로 이런 관지는 제노사이드나 에코사이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인간과 비인간 생명은 물론 행성 자체 절멸, 그러니까 옴니사이드 가능성마저 상상하고 적극적으로 반긴다.···세계 종말은 인간이 온갖 세속적이고 육체적 속박을 벗어던진 순수 영혼으로서 진정한 자아를 실현하도록 이끄는 멀리서 일어나는사건으로 여겨진다.

  이 개념은 얼핏 정신 나간 듯 보일지도 모르지만, 오늘날까지도 변함없이 상상계 필수 기층을 떠받치고 있다.···‘휴거에 대한 기독교 근본주의자 사상에서, 에코파시스트 종말론 비전에서, ‘청소된 세계를 갈망하는 인종주의자 꿈속에서, 그리고 이 거친 대지와 그곳에서 살아가는 못마땅한 거주민에게 넌더리 내고 다른 행성을 테라포밍함으로써 좀 더 나긋나긋한 지구 버전을 구축하고자 혈안이 돼 있는 억만장자 환상 속에서 말이다. 그 꿈은 일견 미래지향적이고 시대를 앞서가는 듯 보이지만 실은 정착형 식민주의 주민이 지구 대부분을 네오 유럽으로 바꿔놓은 테라포밍 과정을 다시 한번 추진하고자 하는 유제(遺制)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118~119)

 

역사에서 가정이란 부질없다고는 하나 이렇게 전복해본다. 가령 아시아 몇 나라가 제국주의 전쟁을 벌여 유럽을 식민지화했다면 그들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인류학이란 학문이 유럽인을 대상으로 펼쳐졌다면 기독교에 휘감긴 그 문화가 얼마나 황당한 미신 덩어리로 치부됐을까? 얼핏 정신 나간 듯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 당시 유럽이 문화적으로 앞서 있어서 서세동점이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이 가정은 유럽중심주의 또는 인도유럽어 패권주의 또는 앵글로아메리카 제국, 아니 기독교 일극 집중구조 신화를 깨뜨리는데 유력한 역발상일 수 있다. 찬란한 문명, 위대한 과학이 오직 휴거를 향해 질주해온 유제(遺制) 욕망 차라리 망상이라고.

 

아미타브 고시에 따르면 알프레드 테니슨(1809~1892)<In Memoriam>에서 이렇게 읊었다.

 “한층 높은 종족의 전령···

  짐승을 몰아내고 위쪽으로 움직이라.···

  멀리서 일어나는 성스러운 사건,

  모든 천지 피조물이 그곳으로 이동한다.”

 

지구 밖 저 멀리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있고 유럽기독교도는 거기로 올라간다(휴거)는 이야기다. 이 시는 묵시록 비전을 읊은 종교시가 아니다. 당대 탁월한 과학 지성이기 때문에 존경받은 시인이 쓴 과학 시다. 이 시는 과학을 종교 프레임에 융해시킨 일극 집중구조 서사다.

 

단도직입으로 말하면 서구 과학은 기독교 신학 세속 버전 중 하나다. 지구 안에서 펼쳐졌던 제국주의 과학이 지구 밖으로까지 확장되었을 뿐이다. 그 이름이 우주과학일 따름이다. 달과 화성을 탐사하는 이유도 제임스웹 망원경을 만든 이유도 휴거를 통해 신과 하나 되기 위해서다.

 

얼핏 정신 나간 듯 보일지도 모르지만, 오늘날까지도 변함없이 상상계 필수 기층을 떠받치고 있다. 누가 이 사실을 부인한단 말인가. 우주과학은 여러 세부 항목에 따른 각기 다른 과학을 포괄하지만, 물리학을 빼놓을 수는 없다. 어떤 천재 물리학자가 우주 구성 원리를 설명하는 단 하나 방정식을 찾기 위해 연구를 멈추지 않겠다는 각오를 피력했다. 단 하나 방정식을 왜 전제하는지 꼭 물어야 할 이유는 없으리라. 그는 개신교도다.

 

이런 논지가 불편한 사람이 분명히 있다. 특히나 사려 깊은 사람에게는 논의 대상을 단순화하고 자신만 복잡한 존재라고 전제라는 짓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짓은 나쁜 짓이 맞다. 그렇다면 문제는 서구 제국주의 정치, 종교, 예술, 과학과 그 상호관계가 참으로 복잡한가, 여부에 달렸다. 제임스웹 망원경으로 해왕성 고리와 위성 7개를 선명하게 포착하는 우수한 과학과 앵글로아메리칸은 코로나19에 감염되지 않는다며 마스크 쓰기를 거부하는 우스운 기독교가 공존하는 현상은 얼핏 복잡한 듯 보일지도 모르지만 매우 단순하다. 과학을 신이 내린 은총이라고 생각하는 일과 신앙을 과학적 진리라고 생각하는 일이 어찌 복잡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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