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자의 생명사 - 38억 년 생명의 역사에서 살아남은 것은 항상 패자였다! 이나가키 히데히로 생존 전략 3부작 3
이나가키 히데히로 지음, 박유미 옮김, 장수철 감수 / 더숲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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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은 치열한 경쟁 끝에 공존의 길을 찾아내 다른 생물과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법을 터득했다. “경쟁하기보다 서로 도와야 살아남을 수 있다.” 치열한 자연에서 속씨식물이 내린 결론이다. 서로 돕는 공생관계를 위해 속씨식물은 무엇을 했을까. 곤충에게 꽃가루를 주고 꿀을 주었다. 새들에게는 달콤한 열매를 준비했다. 자기 이익보다 먼저 상대방 이익을 위해 베풀어주는 일이 바로 공생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방법이다.

  신약성서에 이런 말이 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리라.” 이 말을 설파한 예수가 세상에 나타나기 전 아득히 먼 옛날, 속씨식물은 이미 이 경지를 넘어서 있었다. (패자의 생명사165~166)

 

서로 돕는다느니, 심지어 먼저 베풀어준다느니 하는 표현은 인간에게나 해당한다고 생각하므로 식물이 그런다고 하면 우리는 으레 수사학 수준으로 치부한다. 더군다나 기독교도라면 예수보다 속씨식물을 높이는 이런 말에 실재성을 부여할 리 만무다. 이미 너무 진부한 진실이어서 거듭하기 뭣한 말이지만, 이런 태도는 오만도 아니고 그냥 치기puerility일 따름이다.

 

서로 돕고, 먼저 베푸는 일을 통속윤리 맥락에서 읽으면 인간적인 미덕으로 들린다. 윤리를 생존하기 위한 수리數理로 이해할 때 비로소 패자 미학에 깃들 수 있다. 서로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결핍, 기다리고만 있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곤경에 내몰린 생명이 결단하는 결곡하고 곡진한 행위가 이 말고 달리 있겠는가. 참 생명윤리는 인간 이전에 이미 엄존하고 있었다.

 

인간 이전 참 생명윤리는 자연Sein과 당위Sollen 사이 간극이 없다. 정신과 신체, 이론과 실천 사이 괴리도 없다. 정신이 과잉 진화한 인간만이 이 간극과 괴리를 떠안고 있다. 그래서 명령이 필요하다: “주라”. 심지어 보장도 필요하다: “주리라”. 이 예수 명령을 옹글게 따를 때만 인간은 식물 생명윤리 경지에 온전히 오를 수 있다. 어찌하면 옹글게 따를 수 있는가?

 

패자 정체성을 찐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여야 한다. 진화 정점이니 만물 영장이니 하느님 형상이니 하는 자기기만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류는 패자로서 수관tree crown으로 쫓겨나 생존하는 동안 나무 덕분에 직립보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직립보행은 축복이어서 저주가 되었다. 공생을 팽개치고 말았으니 말이다. 외길은 나무, 즉 속씨식물로 열린다. 거기가 에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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