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仁王산은 한양도성 서쪽 내산內山이다. 본디 이름은 서산西山이었다. 조선 세종 때부터 왕실 수호 기원을 담아 금강신金剛神 인왕산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제는 이 이름조차 아득해지고 있으니, 그나마 겸재 <인왕제색도>를 기억하는 20대 딸아이가 기특할 따름이다. 이 인왕산을 염천(섭씨 36도) 한가운데서 넘고 걸었다. 3시간 30분이 소요됐다. 이로써 한양도성길, 서울둘레길, 북한산둘레길, 관악산둘레길 걷기와 한양도성 4내산, 4외산 넘기가 모두 끝났다. 덤으로 인왕산둘레길 북면마저 걸었다. 걸은 실거리로 따져보면 400km가 훨씬 넘을 듯하다.
독립문역에서 올라가 곧장 넘어가는 길로 향한다. 거의 모든 구간이 완만한데다 계단을 잘 조성해놓아서 어린이와 함께한 가족이 드물지 않게 보인다. 땡볕을 가려줄 숲이 없는 능선길이라 숨이 거칠어진다. 그래도 크게 힘들이지 않고 남북으로 놓인 인왕산 줄기를 넘어선다. 흔히 편하게 가는 창의문 쪽 길 아닌 홍지문 쪽 길을 택한다. 이 능선길을 따라가다 보면 복원되지 않고 방치된 조선 시대 탕춘대성이 드문드문 있다. 분단 이후 만들어진 참호도 군데군데 있다. 숲이 스스로 빚은 자연은 무심히도 아름답지만, 숲에 인간이 남겨놓은 역사는 아프고도 흉하다. 길가 나뭇가지에 앉은 직박구리 한 마리가 피하지도 않고 사람 나를 빤히 쳐다본다.
이 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가면 세검정 삼거리가 나온다. 거기서 고개를 넘으면 청운동으로 갈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홍지문에서 다시 방향을 왼쪽으로 틀어 인왕산 둘레길 표지를 좇아간다. 얼마 안 가서 인왕산 서북 사면으로 들어가는 가파른 계단 길을 만난다. 계단 길이 끝나자마자 어둡고 습한 기운을 뿜어내는 울창한 숲이 나타난다. 미처 눈 돌릴 여유도 주지 않고 다양한 버섯 향연이 펼쳐진다. 버섯에 주의를 기울이는 동안 땀은 이미 겉옷 대부분까지 적셔 놓는다. 상상 속에서 홍제동 쪽 인왕산 주름을 가늠하며 오르내리기를 거듭하는데 입을 다물고 숨을 쉴 수가 없다. 가져간 물은 이미 바닥이 났다. 시원한 막걸리 한 대포가 간절할 즈음 무악재역을 알리는 표지가 나타난다. 이만하면 됐다 싶어 흠뻑 젖은 걸음으로 도시에 깃든다.
내가 서울을 걷기 시작했을 때는 숲부터가 아니었다. 내 인생 여정을 따라 6번 국도와 그 이면도로 후미진 도시 골목에서 출발했다. 문명 언저리에서 태어나 그 한가운데로 진입해 살아온 여정을 돌아보는 일에 관심 두었기 때문이다. 도시를 걸을 때 주위 사람들은 나를 같은 맥락에서 응원했으리라. 숲을 걸을 때 주위 사람들 시선은 어땠을까. 특히 가족, 더 특히 서울 대형병원에서 태어나 줄곧 아파트에서 살아온 딸아이는 숲에 심취하는 아비를 어떻게 생각할까. 숲으로, 그리고 더 깊숙이 들어온 내 여정은 내 운명이지만, 내 운명에 나만 있지는 않으니 여기서 옹글게 인생 전경을 톺아 봐야 하지 싶다. 결국 숲에서 배우는 네트워킹 본성이 구현되어야 할 장은 인간세계다. 내가 나무며 곰팡이가 아닌 한, 내 숲길 끝에는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들과 더불어 숲과 공생하지 않는다면 내 숲길은 아라한 파라다이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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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편 끝에 남쪽 내산 목멱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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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편 왼쪽 불쑥 솟은 북쪽 내산 백악, 오른쪽 완만하고 나지막한 동쪽 내산 타락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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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춘대성 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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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씨년스러운 폐허, 현대 군사 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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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나무싸리버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