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밤 평택 사는 50년 지기를 오랜만에 만났다. 밤늦게까지 마신 술이 살짝 덜 깬 채, 일요일 아침 일찍 서울로 왔다. 그냥 귀가하기는 아쉬운 시간대라 무작정 지하철을 탔다. 잠시 생각한 끝에 독립문역에서 내려 인왕산 숲으로 향했다. 인왕산에도 둘레길이 있었다. 창의문 근처까지 걸으면 얼추 점심시간이 될 듯했다.

 

다른 숲에서와 마찬가지로 버섯과 돌꽃을 찾으면서 천천히 걸었다. 늘 그렇듯 숲은 언제나 예상 밖이다. 연방 나지막이 탄성을 지르며 눈에 담고 사진에 남긴다. 바로 길가지만 정색하고 살피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관목 덤불 뒤에서 발견한 영지 군락이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했다. 군데군데 열린 공간을 통해 대도시 풍경이 달려들곤 하지만 숲은 느닷없는 신비로 가득 차 있다. 얼마쯤 걷는데 뒤에서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부부가 손을 잡고 걸어온다. 도시 인근 낮은 산 숲이 깊으면 얼마나 깊겠냐며 데면데면하게 지나간다. 나는 웃으며 방금 거둔 영지를 보여주었다. 숲은 그들이나 나한테 충분하게 깊다.


숲에서 나와 효자동을 지나는데 관광버스가 줄줄이 서 있다. 청와대 구경 온 황국신민 나르는 차량이다. 높은 진동수 신라어를 구사하는 어떤 사내가 의기양양 떠든다. 대통령 떠바리가 마 그쯤은 돼야 하능 거 아잉교? 그래요, 당신들은 그렇게 얕게 살다 가세요. 깊은 숲에서 배운 깊은숨 한 번 쉬고 나는 국시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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