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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성, 양자역학, 불교 영혼 만들기
빅터 맨스필드 지음, 이세형 옮김 / 달을긷는우물 / 2021년 12월
평점 :
융 심리학에서 이론과 실제는 모두 해방철학과 다르다. 융은 우리에게 대극 긴장이 언제나 분명히 활력을 불어넣는다고 말하는 데 반해, 해방철학은 우리에게 궁극 목표는 완전한 대극 초월이라고 말한다. 융은 무의식과 대화하기, 즉 깨어 있는 동안 꿈꾸기, 생각을 제거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상상하기를 제안한다.......해방철학은 작용하는 마음을 완전히 제압하기 위해 정신 산물이나 형태를 철저히 부정하기를 원한다.(372쪽)
적극적 상상과 대상 없는 명상은 원리와 수행에서 너무 달라서 한꺼번에 적용한다면 상쇄시킬 수 있으므로.......동시 작용이 아니라 전체를 파악하는 대안적 방법으로 이해해야 한다.(375쪽)
융이 이 글을 읽는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구태여 애써 묘사하지 않아도 나는 그가 지을 미소를 대뜸 떠올릴 수 있다. 맨스필드는 시종일관 융이 정신 치료하는 임상의라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글을 썼다. 물리학자이면서 ‘영적 지도자’인 그는 융을 심리학자로만 대했을 뿐이다. 상대방이 마주한 현실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이론 비판은, 옳고 그름을 떠나 자기 관지만 대변할 뿐이라는 치명적 약점을 떠안을 수밖에 없다. 라캉처럼 실제 치료는 거의 않고 이론만 펼친 사람이라면 모르되, 융은 자신이 치료한, 또는 치료할 사람을 의식하지 않은 채 이론을 펼칠 수 없는 상황임에도, 심지어 오만한 하수 취급을 받았으니, 그가 지을 미소를 상상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숙의 치료하는 과정에서 드물지 않게 받는 질문이 있다. “선생님, 우울증 치료에 기도가 도움이 될까요?” 물론 기도란 말에는 참선, 명상, 요가 따위가 모두 포함된다. 나는 질문자가 이미 어떤 종교나 수행에 접근해 있을 경우, 일단 무조건 “아니!”라고 답한다. 이치는 간단하다. 그게 도움이 된다면 나한테 왜 왔겠나. 유효 여부를 떠나 기본적으로 범주 오류다. 구도와 치료가 같다면 사제와 의사가 같아야 하지 않겠나. 고대에는 그랬다가 답일 수 없다. 고대는 오늘 인간에게 외계다. 외계에 잘 적응하는 자들이 있다. 그래서 예컨대 나는 『인문과 한의학, 치료로 만나다』(2014)를 통해 철학자라는 강신주와 스님이라는 법륜이 치료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강연과 상담을 비판했다.
물론 구도와 치유에는 교집합이 존재한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고갱이가 같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맨스필드가 그토록 의지해 마지않는 유심론에 따른다면, 환자가 스스로 구도자라고 마음 구성하지 않는 사실, 구도자가 스스로 환자라고 마음 구성하지 않는 사실은 전혀 다른 만큼 전적으로 중요하다. 환자는 스스로 원해서 아프지 않았으므로 그가 처한 일극 치우침을 바로잡기 위해 적극적 상상력이 필요하고, 구도자는 스스로 원해서 참선하므로 화두 이외 사념을 제압하는 일이 필요하다. 전자는 후자보다 수준이 낮은 일도 아니고, 후자에 이르기 위한 한 과정도 아니다. 세계 내적 본성에 따르는 삶인 한, 본질과 비본질로 나눌 수도 없다. 세계는 여러 겹, 여러 결이다.
적극적 상상과 대상 없는 명상은 동시 작용이 불가능할 정도로 다른가? 피상적인 관찰이다. 하나를 상상하면 제압되는 다른 하나가 있기 마련이다. 하나를 제압하면 다른 하나는 솟아오르기 마련이다. 둘 다 단박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닌 한, 전경 속에서 보면 다르지 않다. 동시 작용이 가능하다. 아니 이치상 언제나 동시 작용이다. 모순 공존, 인도유럽어로는 역설, 내 언어로는 비대칭 대칭이다. 이 상태를 견디지 못하는 아리안-힌두 전승에서 한사코 합일을 추구한다. 정신을 뛰어넘는다고 자부하지만, 저들의 합일은 정신 기획일 따름이다; 찰나적 해방은 양자 세계에 뚫린 구멍일 따름이다. 그 해방을 일상화한다는 말은 세계 바깥으로 나간다는 말이다. 세계 바깥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