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성, 양자역학, 불교 영혼 만들기
빅터 맨스필드 지음, 이세형 옮김 / 달을긷는우물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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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빛은 파동성이나 입자성을 띠지 않는다. 우리가 무엇을 측정할지 결정하기 전에 파동이다’ ‘입자다가정하는 일은 오류다. 우리가 선택하기 전에 그들은 확정되어 있지 않다. 과거가 현재에 이미 충분히, 상세하게 존재한다고 상상하는 일이야말로 오류다.......우리는 우주를 정의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우리가 묻는 질문이 부분적으로 우리가 구하는 답을 결정한다. 우리는 자연을 자극해서 독백하게 할 수 없다. 대신 우리는 자연과 대화에 참여해야 한다.(186~187)

 

초등학교 때 기억 한 장면이다. 매섭게 추운 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 할머니께서 먼 길(!) 떠나는 형 옷매무새를 고쳐주신다. 전에 없이 무슨 목도리 같은 천으로 귀를 포함한 머리까지 감싸면서 추우니까 조심해라.” 반복해서 말씀하신다. 형이 떠난 뒤 내가 할머니께 여쭌다. “할머니, 바깥이 엄청 추운 줄 어떻게 아세요?” 할머니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말씀하신다. “이름 있는 날은 그 값을 하는 법이거든.” 그날은 121일이었다.

 

121일은 그 당시 중학교 입학시험일로 정해져 있었다. 자연법칙이나 현상과 무관하게 인간이 정한 제도다. 그런데 어떻게 그 이름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추울까. 소한·대한에 춥다면 그는 그래도 수긍할 만하다. 유구한 자연 경험에 바탕을 둔 절기니까 말이다. 하지만 자연과 인과적 연결 없는 중학교 입학시험일에 인간이 겪는 심리적 추위와 자연이 상응한 셈인데 이게 말이 되는가. 그 후로도 드물지 않게 일어나는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나는 의문을 심화하지도 온전히 무시하지도 못한 채 여기까지 흘러왔다.

 

흘러가다가 우주에 참여한다는 말 앞에 아연 멈춰 서서 사색 깃을 여민다. 인간이 우주에 참여한다, 자연과 대화에 참여한다는 말은 과연 무슨 뜻인가? 그 뜻이 선뜻 들어오지 않을 때 반대 경우를 생각해보면 쉽다. 우주가 저기 바깥(out there)에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상하다. 이 말속에 이미 인간인 우리가 여기 안에 있는 우주와 독립·분리되지 않는데, 왜 구태여 참여한다고 하는가?

 

참여는 측정하고 정의하는 인식, 그러니까 정신 요건을 수반한다. 정신 요건을 충족시키는 찰나가 반환점이다. 되돌아 묻는다: 측정하고 정의하는 행위를 참여라고 할 수 있는가? 측정을 통해 태초로 정의되는 우주라면 참여가 아니고 구성, 그보다 (/2) 창조라 해야 한다. 창조인 찰나가 반환점이다. 되돌아 묻는다: 물질에 실체를 투사하면 오류이고, 정신에 실체를 투사하면 진리인가? 어찌 보면 말장난 같은 이 점검을 굳이 하는 까닭은 서양사상이 어떤 경로를 찾든 여전히 이원론 안에서 헤매고 있음을 환기하기 위해서다.

 

헤매지 않을 수 있다. 인간 정신이 세계정신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진리, 인간 측정과 정의가 세계 측정과 정의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진리 앞에 엎드리면 된다. 인간 정신이든 측정·정의든 전체 속 개체를 구동·구현할 따름이다. 정신을 거대 보편으로 확장할 수 있다는 아리안-힌두 오만은 남성 가부장 강력 이데올로기에 침륜된 소치다. 정신 거점을 지우고 우주에 흔연히 배어들어 갈 때 비로소 참으로 참여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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