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하는 신체 -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선다는 그 위태로움에 대하여
우치다 타츠루 지음, 오오쿠사 미노루.현병호 옮김 / 민들레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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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죽은 자 목소리가 들린다.”는 사람과 들리지 않는다.”는 사람이 있다면 들린다고 주장하는 쪽이 정치적으로 강한 힘을 갖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유언집행인이나 증인을 자처하는 사람은 영령들 한을 풀어주자.” 하면서 여하튼 구체적 정책 제언으로 의미 축소에 골몰합니다. 이렇게 죽은 자 목소리 통역하는 사람을 믿지 못하게 하려면 죽는 자 목소리 따위는 내게 들리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죽은 자 목소리는 내게도 들리지만 뭘 말하는지 알 수 없으므로 통역해서는 안 된다. 죽은 자는 영령들 한을 풀어 달라.’ 따위처럼 뻔해서 무의미한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 말은, 자처한 유언집행인이 스스로 듣고 싶어서 스스로에게 보내는 메시지일 따름이다.”라고 말하는 일이 아마도 유일하게 유효한 영적반격 아닐까 싶습니다.(262~263: 인용자가 문맥을 고려해 의미 왜곡 없이 압축함.)

 

이 글 앞에서 4·16을 떠올리지 못한다면 오늘 눈 뜨고 사는 한국인이 아니다. 나는 이 책을 여러 번 읽었는데 내내 4·16과 낭·풀 공부에 잇대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이 책은 죽은 자와 소통이 어떠한 무엇인지 숙고하게 만들면서 끝난다.


치밀하게 의도했는가와 무관하게 우치다 타츠루는 레비나스나 라캉을 깊이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이런 결말에 분명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리라 짐작하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양차대전을 겪으면서 서구 철학이 죽은 자가 지니는 본원적타자성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부분에 그가 여러 번 강조점을 찍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우치다 타츠루가 견지하는 복잡한 상태, 그러니까 모호함을 견디는 지성이 죽은 자가 지니는 복잡한 정체성, 그러니까 모호함을 웅숭깊게 포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산 자와 사물 사이에서 죽은 자 목소리가 영원한 시간을 뚫고 결코 사라지지 않는 채 울려 퍼지는”(레비나스) 모호한 풍경은 우치다 타츠루 지성을 깨웠다. 그 덕에 통역하는 정치권력을 투사병리로 진단할 수 있었다.

 

권력이 자행하는 투사를 막아내려 들리지만 알 수 없다.’고 한 말은 실제로 알 수 없어서라기보다 아는 내용을 말하면 똑같이 죽임당할 수밖에 없으므로 이를 막기 위해 불가결하게 선택하는 능동 함구. 함구로 함성이 빅뱅. 함성은 죽은 자를 삶 한가운데 불멸로 세운다. 거기서 공생윤리학이 찰나마다 산 자를 새로이 생성한다.

 

찰나마다 새로이 생성되는 산 자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과 알아차림, 그리고 받아들임은 언어적이든 비언어적이든 죽은 자가 영으로 깃들인 목소리를 포함한다. 동시성이나 상응을 통해 산 자가 각성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다.

 

대통령 당선자와 국무총리 내정자가 영매에게 공공연히 의존한다는 뉴스를 듣는다. 저들이 사적 욕망을 채우는데 동원되는 영매는 모시는 신이 정말 있다면 신벌을 받아 마땅하다. 신벌을 내리지 않는 신이라면 잡신이 틀림없다. 잡신들은 준동하는데 어찌해 성신은 꼼짝하지 않는지 참으로 귀신 곡할 노릇이다. 이렇게 질문해보면 답이 나온다. 성신을 모신 참 영매가 있어서 4·16 ‘목소리를 전해준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 영매가 하는 말을 사람들이 신뢰할까? 그 계시를 내린 신을 성신이라 인정할까? 그럴 리 없다. 누구보다 먼저 성신 신앙 지닌 기독교도가 난리 떨며 이단으로 몰 터. 이 이치를 알아야 성신인데 그 성신이 목소리를 전해줄 리 또한 없다. 당최 길이 아니다. 죽은 자와 소통하는 길을 이런 차원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생명네트워킹 반야 장을 여는 참 과학에 참여해야 한다. 진짜 영적인 영적반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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