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하는 신체 -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선다는 그 위태로움에 대하여
우치다 타츠루 지음, 오오쿠사 미노루.현병호 옮김 / 민들레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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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살아 있는 세계와 절대 다가가거나 만질 수 없는 세계 사이, 인간세계에 속하지 않지만 인간세계에 가까운, ‘인간이 다가갈 수 있을 듯도 하고 없을 듯도 한 모호한 영역에 죽은 자가 있습니다. 그런 중간상태 그 자체를 주제로 삼아 의식화하기 위한 장치로서 장례가 존재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장례는 미디엄medium’, 중간’, ‘매개’, ‘미디어가 아닐까요? 무엇과 무엇에 중간이 있어 그 둘을 매개하는 일이 장례가 지닌 인류학적 기능 아닐까요? 매개가 없으면 커뮤니케이션은 성립할 수 없으니까요.


  ‘배제하다라는 말을 우리가 쉽게 쓰지만 잘 음미해보면 상당히 난해한 말입니다. 배제할 때 사실상 배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뭔가를 배제하는 일은 배제함으로써 도리어 거기에 있도록 한다는 이중 조작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배제하는 무엇은 실은 있기를 바라는 무엇입니다. 밖으로 쫓겨났다는 자격으로 거기 있는 무엇이 필요합니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형식으로 존재합니다. 부정당하는 형식으로 거기 머무릅니다.(235~236)

 

1928년 폴 디랙은 반물질이 존재하는 세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얼마 뒤 양전자 존재가 증명되었다. 반물질은 물질세계에 존재하는 우리로서는 볼 수 없다. 볼 수 있다 해도 물질과 만나는 찰나 쌍소멸이 일어나므로 끝내 볼 수 없다. 볼 수 없다는 말과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다르다. 죽음은 보이지 않지만 존재한다. 죽음이 존재하는 세계를 반세계라 한다면 우리 인식에서 의도적으로 배제되어 있을 뿐이지 엄존한다. 비대칭대칭 진리에 예외는 없다.

 

인간은 왜 죽음을 배제하는가. 삶이 지속되기를 염원하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죽지만 지금과 바로 다음 순간은 아니라고 믿으려면 죽음을 배제해야 한다. 존재를 부정하고, 쫓아내어 배제했지만 배제된 죽음은 반드시 거기 머무른다는 진실을 모르지 않는다. 아니 반드시 거기 머무르기 때문에 한껏 실컷 배제한다. 어느 카이로스에 죽음이 찾아오기를 염원하기 때문이다. 삶은 합일을 전제한 분리며, 죽음은 분리를 전제한 합일이다. 분리인 삶은 우렁찬 장엄이며, 합일인 죽음은 엄숙한 장엄이다. 삶은 죽음에 의존하지 않은 채 단 한 찰나도 견딜 수 없으므로 죽음을 그렇게 배제한다.

 

죽음을 절묘하게 배제하는 데 장례만큼 절묘한 장치는 없다. 죽은 자를 잠시 산 자 세계에서 기림으로써 반세계와 세계에 교집합이 만들어지도록 한다. 한편으로는 죽은 자로 하여금 그를 구성해온 인간들 사이에서 산 자로 마지막 향수되도록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산 자로 하여금 더 이상 죽은 자를 볼 수 없는 반세계를 구성해보도록 한다. 이렇게 삶과 죽음을 동시에 조명함으로써 산 자와 죽은 자가 소통하도록 매개하는 장치가 바로 장례인 셈이다.

 

3년 전 오늘, 그러니까 2019419일에 엄중한 우울장애로 오랫동안 고통 받던 한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거두었다. 그는 처음 격심한 위기를 맞았을 때 내게 와 치료를 받았다. 죽음 같은 고통에서 벗어나 쉽지는 않았지만 사회로 복귀했다. 맹렬한 우울 상태가 이따금 그를 엄습해오곤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세계를 놓았다. 그 반세계 앞에서 나는 이렇게 썼다.

 

십여 년 전 살인사건과 수형에 휘말린 극심한 우울장애로 생사의 기로에 서 있던 청년과 상담했다. 선문답 같은 대화 끝에 그는 나를 백그라운드 삼아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나는 부단히 벗으로, 증인으로 곁을 지키려 애썼지만 힘든 현실 삶을 울며불며 견디던 그가 기어이 스스로 목숨을 거두었다. 나와 만나기로 약속한 날 꼭 일주일 전에. 나는 부모상을 당했을 때보다 더 비통하게 울었다. 약속한 인사동에 흰옷 입고 나와 그를 맞는다. 국수 한 그릇, 그리고 그가 좋아했던 소주 한 잔 놓아준다. 무슨 말을 하랴. 그의 모진 운명, 그리고 거기 잠시 깃들었던 못난 의자의 운명을 가만 들여다볼 뿐이다.”

 

그와 만나기로 약속했으나 끝내 만나지 못한 그 곳으로가 삼년상을 마치려고 한다. 지난 3년 죽은 자로서 그와 산 자로서 내가 서로 어떻게 배제되어 있었는지, 소통하고 있었는지 생각해본다. 지금 내 공부가 답을 줄지, 주면 무엇일지 몹시 궁금하지만 기대는 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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