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하는 신체 -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선다는 그 위태로움에 대하여
우치다 타츠루 지음, 오오쿠사 미노루.현병호 옮김 / 민들레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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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이야기를 하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궁극적 정의입니다.(228)

 

최근 들어 가끔 가기 시작한 음식점 주인이 어느 날 와서 인사를 하며 아는 체를 한다. 아침 출근길에 어디어디를 지나는 내 모습을 보고 참 단정하고 기품 있는 분이다 했는데, 손님으로 와 계셔서 놀랐다.’고 말한다. 전 같았으면 참 비슷한 사람도 있군!’ 하고 말 텐데, 한동안 생각이 거기 머물고 있다. 아침에 보고 저녁에 다시 본 사람이 같은 사람인지 비슷한 사람인지 구별하지 못할 수 있을까. 한두 번도 아니고. 더군다나 내 외양은 쉽게 헷갈리지 않는다. 헌팅캡을 쓰고 수염을 기르고 꽁지머리를 하고 목도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늘 똑같은 검은 가방을 왼쪽 어깨에 메고 서두르지 않지만 범상치 않게 빠른 속도로 걸어가는 노인이 어디 그리 흔할까. 나는 그 사람이 나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우리가 드물지 않게 우스개 삼아 들어온 말 중 도플갱어가 있다. 다양한 버전을 지닌 독일 미신에서 시작되어 문학에도 나타나고 정신질환으로까지 규정되는 100% 닮은 사람을 말한다. 확률적으로는 1/104(1자는 1024제곱)로 존재 가능하다는 연구까지 있다. 서구 중심으로 부정적 맥락에서 언급되는데 이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서구 전통에서 가장 용납하기 어려운 진실이 모순이 공존하는 이른바 이율배반이다. 100% 똑같은 두 사람을 말하지만 그런 존재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전제에서 나온 발상이기 때문에 도플갱어 또한 이율배반 범주에 속한다. 진리 값 1인 진리는 하나밖에 존재할 수 없는 형식논리로 문명과 과학을 구성해온 이상 도플갱어 파국은 어떤 형태든 불가피하다. 서구적 불안과 억압 양식 중 하나다.

 

이율배반을 품을 수 있는 양자물리학, 중관불교, 동시성, 상응 담론에 의지하면 도플갱어는 기괴하거나 악마적인 무엇이 아니다. 물질적 실재든 꿈이든, 심지어 환각이든 자기 자신과 비대칭대칭을 이루는 존재를 만나는 일은 과학 바깥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 사건이 아니다. 그들 사이에도 차이가 없을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이 존재하는 사건과도 본질적 차이가 없다. 가령 정신질환인 환각에서 오는 경우라 하더라도 그만한 곡절이 있으며, 그 곡절에 의거해 판단하면 그 환각이 현실보다 훨씬 더 중요할 가능성이 높다. 사건이나 사태가 지니는 실재성을 물질적 사실성 여부만으로 판단하는 행위도 형식논리 편향 일종에 지나지 않는다. 여태껏 목도하고 환호해온 논리와 과학은 세계 진리 20% 이하만으로 한 왕 노릇이었다.

 

도플갱어를 유령으로 바꾸면 어떤가. 유령을 죽은 자로 바꾸면 어떤가. 죽은 자를 신으로 바꾸면 어떤가. 신을 네트워크로 바꾸면 어떤가. 네트워크가 창발하는 풍경은 상상 불가 영역이다. 상상이 불가할 때 기적이라 하든 신비라 하든, 기존 환원주의 과학 너머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예외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면 음식점 주인이 본 또 다른 나는 내 유령이라 해도 상관없고, 내 분신이라 해도 상관없다. 심지어 하느님이라 하면 또 무슨 상관이랴. 그 존재가 지금 여기 우리 삶에 어떤 소식으로 영향으로 구조로 작동하는가가 관심사 아니겠는가. 그 존재가 도구라서가 아니다. 그 존재와 그 존재를 이야기하는 일이 일으키는 창발 사건 그 자체가 새로운 세계를 구성하고 이끌기 때문이다. 그 이전과 이후, 또 그 바깥은 없다.

 

내 유령 이야기가 궁금하니 그 음식점으로 가서 둘 중 누가 유령인지 알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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