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하는 신체 -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선다는 그 위태로움에 대하여
우치다 타츠루 지음, 오오쿠사 미노루.현병호 옮김 / 민들레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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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둘러싼 야쿠자들을 차례로 베고 나서 자토이치가 칼을 거둬들이는 바로 그때 지잉하는 소리가 나면서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야쿠자들이 두두둑 쓰러집니다.......야쿠자들과는 다른 시간 속을 움직이며 모두를 베어버린 뒤에 지잉하는 소리와 함께 비로소 자토이치가 시간적으로 선행하고 있었던 부분, 다시 말해 모두가 절대적으로 지체되고 있던 만큼 시간이 다시 원래 시간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때 소거되었던 현실음이 돌아와 다시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그 무음과 지잉하는 소리는 휘어진 시간 보정을 의미하지 않나 생각합니다.(157~158)

 

<자토이치座頭市>는 전설적 검객 안마사(座頭) 이치()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로서 1962년 이후 시리즈 26편이 제작되었다. 나도 그 중, 아마도 가장 유명한 한 편을 보았다. 화제 장면은 우치다 타츠루가 말한 그대로다. 나는 이 문제에서도 우치다 타츠루와 생각이 다르다.

 

우치다 타츠루가 계속 문제 삼는 시간적 선후는 자토이치와 야쿠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자토이치 동작과 소리 사이 시간 선후와는 무관한 일이다. 이를테면 범주오류다. 무예에서 이른바 잔심殘心을 거론하는 일 또한 본인 감각 문제다. 이치는 의외로 단순하다. “신체가 뇌보다 이르게 움직이고 먼저 감각한다.” 이는 시간적 문제만이 아니다. 칼을 직접 쥐고 있는 주체는 신체지 뇌가 아니다. 뇌가 감각하는 경계보다 더 넓은, 그러니까 전체인 경계를 신체가 지니고 있으므로 둘 사이 격차는 절대적이며 당연하다. 구태여 시간을 가지고 복잡하게 설명할 이유가 없다.

 

참된 지성이 지닌 복잡함, 그러니까 모호함을 견디는 능력은 단순함도 복잡하게 이해하는 능력과 다르다. 무예인으로 오랜 삶을 사는 동안 부지불식간에 그 눈으로 모든 현상을 해석하는 관성이 그에게 생긴 듯하다. 이 문제는 내게도 마찬가지다. 의자 또는 치유인 눈으로 세상을 읽으면 죄다 아파 보인다. 보통사람이 보지 못하는 소미한 데까지 본다는 자긍심이 한 순간에 환원주의 함정으로 변해버린다. 범죄자 만드는 일만 하던 검사가 하루아침에 대통령이 된 나라 걱정보다 내 앞가림부터 해야 소시민 도리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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