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하는 신체 -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선다는 그 위태로움에 대하여
우치다 타츠루 지음, 오오쿠사 미노루.현병호 옮김 / 민들레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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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동작을 볼 때 느끼는 감동은 단순히 그 사람 몸 근육이나 골격이 부드럽다는 사실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거기에 나와 다른 시간 흐름이 생겨나고 있으며, 나와 그 사람 시간 흐름 사이에 생긴 어긋남취기에 가까운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151)

 

합기도는 의 선입니다.......선의 선을 잡는 일은 말하자면 칼을 내려치는 찰나 상대로 하여금 태연하게 내려쳐주십시오하면서 칼 아래 자기 목을 들이밀도록 하는 일입니다.(152)

 

 

얼핏 보면 전혀 무관한 듯 보이는 위 두 이야기는 같은 본성을 지닌다. 절정 기량을 지닌 무용수가 취하는 아름다운 동작과 선의 선을 잡은 고수가 칼을 내리치는 동작은 같은 동작이다. 감동, 곧 취기에 가까운 느낌을 받는 일과 칼 아래 자기 목을 들이미는 일은 같은 일이다. 춤추는 자가 흐르는 시간과 감동 받는 자가 흐르는 시간이 다른 이치는 무예 고수가 흐르는 시간과 목 내미는 자가 흐르는 시간이 다른 이치와 같다.

 

우치다 타츠루는 시종일관 시간을 말한다. 이는 아마도 그가 무예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프랑스어 텍스트로 레비나스 타자철학을 공부한다는 사실과 유관할 테다. 나는 무예인이 아니며, 프랑스어 텍스트로 레비나스 타자철학을 공부하지 않는다. 내가 알고 깨닫고 깨치는 길은, 구태여 우치다 타츠루와 대비하자면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음악으로 말해보려고 한다. 음악을 무용이나 무예보다 월등히 잘 알아서라기보다 그나마 그 둘에 비해 감응하기 쉬워서 택했다. 물론 최종적으로는 한의학과 숙의치유에 가 닿아야 한다.

 

불가결한 음악 요소 가운데 배음overtone이 있다. 배음은 원래 음 주파수 정수배에 해당하는 음이다. 음악 하는 사람이 능동적으로 드러내기[배음 창법]도 어렵고, 듣는 사람이 알아차리고 듣기도 어려워서 보통 잘 말하지 않는다. 한 음악가가 내려고 하는 음을 연주할 때 꼭 그 음 주파수에 해당하는 순음만을 내어 연주 공간에 배어들도록 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배음과 그밖에 다른 음들이 미세하게 뒤섞이게 마련이다. 이들을 어떻게 제어·조절하느냐가 음악가 수준을 결정한다. 듣는 이가 들을 때도 근본에서 같은 이치가 적용된다. 깊고 풍요로운 배음 사건을 일으키고 거기 더불어 참여할 때 음악가와 청중은 그 자체로 영적 네트워킹이다.

 

네트워킹 사건을 일으키는 배음 공간에서 감응하는 음악가 신체와 청중 신체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 음악가 신체는 시간 흐름을 어긋나게 하는 무용수나 선의 선을 잡은 무예 고수 신체와 같을까? 청중 신체는 취기에 가까운 느낌을 받거나 칼 아래 태연히 목을 들이미는 신체와 같을까? 그렇다면, 감응 상태를 조정해야만 한다. 어긋나는 시간 흐름에서는 취기가 아니라 경이를 느낀다. 취기는 맞물리는 공간 합일, 정확히 표현하면 비대칭대칭에서 느낀다. 배음의 기축은 1:2 상음과 관계인데 이 두 음은 한 옥타브 차이 나는 같은 음이기 때문이다. 선의 선을 잡은 고수 칼 아래서는 태연히, 그러니까 경이에 압도되어 목을 들이밀지만, 배음 공간에서는 심취해 지극한 기쁨으로 온몸을 내맡긴다. 공명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우치다 타츠루는 시간 분리와 공간 합일이 비대칭대칭을 이루며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진리를 아직 드문드문 보고 있는 듯하다. 분리가 일으키는 감응과 합일이 일으키는 감응을 헷갈리고 있으니 누명이 아니다. 우치다 타츠루와 같고 다른 점을 자꾸 초군초군 따지는 까닭은 내가 나와 마주앉은 사람에게 경이를 일으키거나 태연히 목을 들이밀도록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경이를 느끼거나 태연히 목을 들이미는 일이 숙의치유와 무관해서가 아니다. 그 일 뒤에 더 중요한 일이 남아 있는 사람, 그러니까 무용 공연을 보러 오거나 칼싸움을 하러 오지 않고 아파서 온 사람을 상대하기 때문이다.

 

내가 상담치료를 굳이 숙의치유라고 달리 부르는 데는 그만한 곡절이 있다. 정신 질환은 육체 질병보다 훨씬 더 서사성이 강하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 정신 질환은 그 자체가 서사다. 이 서사 문제를 폐기하고 화학합성약물만으로 치료한다는 이데올로기를 관철하기 위해 서구주류의학은 정신을 뇌로 환원시키고 있다. 뇌를 타깃 삼은 화학합성약물만으로는 정신 질환을 온전히 치료하지 못한다. 서사 재구성이 필수다. 서사 재구성을 하려면 반드시 숙의를 해야 한다. 숙의는 신체와 인생 전체를 걸고 소통하는 일이다.

 

소통 과정에서 아픈 사람을 경이로 몰아넣거나 태연히 목 들이밀도록 선의 선을 잡는 일이 필요하지만 그 조차도 기본 접속, 그러니까 어떤 합일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둘은 하나에서 나온다. 이 진리에서 너무 멀리까지 이탈한 상태가 다름 아닌 정신 질환이다. 이 전경을 모르면 무용과 무예에서는 절정 기량을 자랑할 수 있지만 숙의치유에서는 그리 될 수 없다. 숙의치유는 인류 최후 초절정고수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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