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하는 신체 -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선다는 그 위태로움에 대하여
우치다 타츠루 지음, 오오쿠사 미노루.현병호 옮김 / 민들레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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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과거 이야기를 할 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바로 그 상대방과 사이에 내가 구축하고 싶은 관계를 방향타 삼아 기억을 떠올립니다. 이상한 이야기지만 과거는 미래가 구성합니다.

  이런 전미래적 시도는 모든 경우에 일어나고 있는 듯합니다. 이를테면 지금 내가 누군가가 쓴 어떤 책을 읽고 있는데, 문득 문장이 어떻게 끝날지 알겠다 싶은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그 문장 마지막까지 다 읽어버린, 그러니까 이미 미래에 가 닿은 셈입니다. 현재를 마치 과거처럼 회상하는 상태입니다.(146)

 

우치다 타츠루가 쉽지 않은 텍스트인 이유는 이런 장면을 술술 이야기한다는 데 있다. 전미래는 프랑스어 시제로 미래 어느 시점에 완료되었을 동작이나 상태를 기술한다. 우리말에는 없는 시제여서 그렇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인 어려움은 이 시간관이 시간을 인과적으로 인식하는데 어떻게 그 인과를 넘나드는가 하는 데 있다. 우치다 타츠루가 표현한 대로 시간 역류또는 시간 속 왕복운동을 어떻게 상상하는가, 심지어 행동하는가, 어렵지 않을 수 없다. 무예 이야기를 하면서 선을 잡는다, 시간을 쪼개며 밀고 당긴다는 표현을 쓸 때, 뇌로는 얼추 수용하겠으나 신체로는 도무지 감촉되지 않는다. 이 난경 때문에 여기를 통과하지 못하고 서성이다 나는 문득 동시성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동시성은 칼 구스타프 융을 읽을 때 처음 마주했다. 어리다고 해야 할 시절 일인데다가 마법적이란 느낌이 들어 그다지 곡진한 눈길을 보내지 못했다. 만일 지금 마주했다면 태도는 사뭇 달랐으리라. 이 어긋남은 통속한 관지에서 보면 통시적diachronic 문제다. 공시적synchronic 문제기도 하다는 생각에 가 닿는 순간, 그 동안 내가 써온 공시성이 동시성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불현듯 동시성을 정색하고 마주한다. 동시성은 순진한 동시발생 상태와는 다르다. 천 년 사이에도 동시성이 가능하다. 시간은 휘어져 있고, 그 휘어진 시간을 통해 전체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전체성은 시간 국지성을 관통한다. 시간 국지성을 관통하는 전체성은 당연히 공간 국지성도 관통한다. 일찍이 중관불교는 공, 그러니까 비인과 상호의존을 천명했다. 원효는 일심·화쟁·무애를 설했다. 양자물리학은 양자 겹침, 양자 엮임, 근원에서는 공변양자장을 제시한다. 나는 비대칭대칭 구조운동을 숙의한다. 이 고유한 어법들이 각기 지닌 주파수는 서로 배음 또는 화음으로 작용한다.

 

동시성 관지에서 우치다 타츠루를 다시 음미한다. 가령 그가 도무지 알아먹을 수 없는 에마뉘엘 레비나스를 무작정 읽어 나아가다가 문득 문장이 어떻게 끝날지 알아차리는 순간 미래에 가 닿는다고 말할 때, 우치다 타츠루가 가 닿은 미래는 에마뉘엘 레비나스가 이미 완결시킨 과거다. 직선 인과 시간을 따른다면 당연히 시간 역류나 시간 속 왕복운동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국면이다. 만일 휘어진 비인과 시간을 따른다면 시간 역류나 시간 속 왕복운동을 말할 필요가 없다. 지적 부분성, 그러니까 국지성에 머무르던 우치다 타츠루가 전체 지성으로 신체 감각을 여는 순간 자기 미래와 레비나스 과거는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시간 동일성은 본성상 공간 단일성과 짝한다. 그렇게 온전한 전체를 이룬다.

 

전체라는 말은 제압하는 거대 느낌을 준다. 거대인 전체상은 인간이 조작 또는 착각한 결과물이다. 전체는 다만 소미가 빚어내는 네트워킹을 한껏 펼친 전경일 뿐이다. 시간은 공간을 통해 파동으로, 공간은 시간을 통해 입자로 네트워킹을 그려낸다. 이 네트워킹 전체 속에서 개체는 각기 고유한 동시성을 창조한다. 거꾸로 말하면 전체가 각 개체 고유한 동시성을 구성한다. ‘시간 역류또는 시간 속 왕복운동이라는 초자연적, 마술적 뉘앙스에 의존할 이유가 없다. 우치다 타츠루와 나는 이렇게 같지만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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