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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하는 신체 -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선다는 그 위태로움에 대하여
우치다 타츠루 지음, 오오쿠사 미노루.현병호 옮김 / 민들레 / 2019년 3월
평점 :
가장 오래된 말에서는.......대립하는 뜻이 같은 어근으로 표현되어 있다.......동음 원시언어를 미묘하게 변화시켜 그 말에 포함된 서로 반대인 의미를 나타낼 수 있는 표기가 생긴 일은 꽤 나중에 와서다.(20~21쪽)
여기에는 아무래도 인간 존재 근본과 관련 있는 중요한 물음이 숨겨져 있는 듯 보인다. 인간은 왜 일부러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드는 걸까?(23쪽)
나는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프랑스어를 공부했는데 그 이후 영어보다 프랑스어와 훨씬 더 친근하게 지내왔다. 지금도 가령 tradition을 보면 [trəˈdɪʃn]이라는 발음보다 거의 반사적으로 [tʀadisjɔ̃]이라는 발음이 먼저 나온다. 프랑스어 시간에 우연히 선생님이 프랑스어 희다 blanc과 영어 검다 black 어원이 같다는 사실을 말씀해주셨다. 그때는 오, 신기하다 하고 지나쳤다. 바로 뒤 열아홉 살부터 내 평생 화두가 된 비대칭대칭 사상에 깊이 잠기면서는 이런 사실이나 사태를 날카롭고 묵직하게 바라보는 데 소홀히 한 적이 거의 없었다.
섬세하고도 강인하게 내 시선을 이끌어주신 큰 스승은 원효 성사시다. 원효의 한마디는 화쟁이다. 화쟁사상이 품은 진리 가운데 참으로 귀한 보배가 바로 세계 존재가 지닌 모호함이다. 모호하다는 말은 사전이 제시하는 ‘흐리터분하다’는 얄팍한 뜻을 꿰뚫고 들어가야 깊은 진경을 만날 수 있다. 모호함에는 “A이기도 하고 non-A이기도 하다.", 또는 "A도 아니고 non-A도 아니다."라는 모순 공존, 그러니까 역설 진리가 담겨져 있다. 원효 어법으로 상세하게 표현하면 모두 그렇다[皆是]와 모두 아니다[皆非]의 공존을 통해 이룩한 일심-화쟁-무애[一心-和諍-無㝵]가 역동하는 상태고, 원효 사상을 한마디로 정리한 어느 학자 어법으로 간략하게 표현하면 불이이불수일[不二而不守一]이다.
이 모호함을 우치다 타츠루는 시종일관 “복잡”함이라 부른다. 내 관지에서는 명석하지 않은 어휘 선택이지만, 그 관지에서는 최상 표현이리라. 이 어긋남 또한 모호하고 복잡하므로 가히 “여기에는 아무래도 인간 존재 근본과 관련 있는 중요한 물음이 숨겨져 있는 듯 보인다.”라고 할 만하다. 모호함은 단순히 인식 문제가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 문제라는 말이다. 아니, 인간 너머 모든 존재가 모호함을 본성으로 한다는 말이다. 카를로 로벨리는 “공변양자장”으로, 스튜어트 카우프만은 “무질서가 만든 질서”로, 멀린 셸드레이크는 “작은 것들이 만든 거대한 세계”로 증언한다.
모호한 존재가 모호한 말, 그러니까 “대립하는 뜻이 같은 어근으로 표현되어” 있는 말로 말하는 일은 “가장 오래된” 미래인 내가 부둥켜안은 천명이다. 천명을 옹글고 우렁차고 낭자하게 전하는 말 엄마 ᄒᆞᆫ-하나와 여럿[一多], 같음과 다름[同異], 가운데와 가장자리[中邊]를 한꺼번에 나타내는-이 모호한[或] 음성으로 나를 부른다. 첫 발 내디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