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 집회의 수행성 이론을 위한 노트
주디스 버틀러 지음, 김응산 외 옮김 / 창비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부부가 찾아왔다. 부부상담이 아니었다. 아내가 정신적으로 힘들어 해서 남편도 함께 왔다고 했다. 물론 아내 문제에 남편이 전혀 관련되지 않는 경우란 없지만, 일단 아내 말부터 들어보기로 했다. 아내는 이야기 절반 이상을 남편 성품과 직업이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에 배당했다. 상담이 끝난 뒤 남편은 자신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 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번째도 그랬다. 세 번째 왔을 때, 나는 상담 시간 절반 이상을 남편에게 배당했다.

 

남편은 이런저런 내 진단과 처방 이야기들을 대부분 수긍했다. 가끔 직업적인 선입견이 작용해 어긋나기도 했지만 그는 매우 선하고 정한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그가 자신과 아내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결정적인 한마디를 던졌다. “아내는 무엇 하나에 꽂히면 심취하는 타입이고 나는 여럿 사이 균형과 조화를 중시하는 타입이죠.” 아내가 어떤 극단으로 내달리는 모습을 지적한 말이다. 나는 즉시 부드럽고 단호하게 말했다. “균형과 조화도 또 다른 극단입니다.”

 

많은 이들이 많이 균형과 조화를 말한다. 균형이 얼마나 기우뚱한 채 흔들리는 조마조마한 상태인지 모르면서 그냥 인습으로 전해지는 말을 되뇌는 경우가 보통이다. 이 균형은 중간지점에 정지한 사태며, 실재 균형이 아니다. 조화가 얼마나 팽팽한 한계 투쟁인지 모르면서 그냥 인습으로 전해지는 말을 되뇌는 경우가 보통이다. 이 조화는 억압적 타협이며, 조화가 아니다.

 

중간지점 정지와 타협이야말로 위험한 극단이다. 기우뚱한 채 흔들리는 조마조마한 참 균형, 팽팽한 한계 투쟁인 참 조화를 아는 사람은 무엇 하나에 꽂히면 심취하는 다른 사람에 관대하다. 심취와 참 균형·조화가 그리 먼 거리에 있지 않다는 진실을 알기 때문이다. 심취해보지 않은 사람이 말하는 균형과 조화가 어떤 좌표를 그릴지 안다면 당최 인색할 수 없는 노릇이다.

 

주디스 버틀러를 읽으면서 내가 끊임없이 서성였던 지점은 인간이 인간 관지에서 하는 말과 인간이 비인간, 그러니까 낭·풀과 곰팡이 관지에서 하는 말 사이 어떤 구체적 차이가 있을까, 하는 물질적 질문자리였다. 질문자 한계는 분명하다. 인간 경계를 아무리 칼날처럼 밟고 서도, 아니 그 너머로 가도, 은유를 면치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은유면서 은유인 말을 쓰므로 뒤집어진 결과로 나타나는 불가피한 현실이다. 여기를 돌파해야 종간 균형과 조화를 이룰 텐데.

 

꿈을 꾸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혼신으로 애써도 되지 않는데 어느 순간 나 홀로 인간언어를 벗어나 경이로워하는 꿈 말이다. 깨어나서 한밤중에 묵상한다. “단순히 소망이기만 하면 그야말로 개꿈이다. 소식으로 전해오기를 길을 걸어가면서 기다린다.” 그 길은 아직 모른다. 언제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언제는 알고 살았던 삶이었나. 모르니까 옹글게 우렁차게 낭자하게 간다. 전미래 몸짓으로 달리 또 같이네트워크 수행성을 상연하고 또 상연하면서 나아간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