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 집회의 수행성 이론을 위한 노트
주디스 버틀러 지음, 김응산 외 옮김 / 창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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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정당성에 이의를 제기하고자 거리에서 노숙하는 일은 공적인 것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일만은 아니다. 분명 이는 위태로움에 놓인 신체를 그 강력한 주장, 견결함, 그리고 불안정성에 위치시켜, 혁명 시간과 관련해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사이 구분을 극복하려 한 방법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른바 사적 영역에 머물러야 하는 필요들이 밤이고 낮이고 광장으로 표출되어,.......거기와 여기 모두에 존재한다. 신체들은 잠자는 순간에도 결코 발언을 멈추지 않으며, 그리하여 침묵을 강요당하거나, 격리되거나, 혹은 부정당할 수 없다. 때로 혁명은, 모든 이가 도로와 광장이라는, 자신들이 한데 모인 임시적 공거 현장에 끈질기게 머문 채 귀가를 거부하는 까닭에 일어나기도 한다.(143)

 

그나마 먹고살 만한 사람들이 대선, 코로나, 설 연휴에 관심 두고 있는 와중 한 매체가 어느 노숙인이 쓴 추도사를 표제로 올린 기사를 내보냈다. 옆에서 죽어간 다른 노숙인을 위해 그 노숙인이 쓴 추도사를 읽으면서 나는 깊은 상념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우리들이 광장에 텐트 치고 사는 자체가 그 어떤 집회 시위보다 더 효과적인 무언의 시위라고 한 부분과 맞닥뜨리는 순간 생살을 잘라내는 듯 맹렬한 통각이 달려들었다. 그 동안 수도 없이 그 텐트 앞을 지나다녔지만 단 한 번도 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어디 나뿐이겠나. 노숙인은 노숙인대로 비노숙인은 비노숙인대로 대부분 사적 영역에서 생각을 가두었음에 틀림없다. 그 가둠에는 당연히 전망 가둠도 포함된다. , 이런!

 


무능하고 게으른 개인 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동정, 동정 피로, 낙인, 죄악 과정을 거쳐 관심 바깥으로 타자 노숙인, 심지어 노숙인인 자신까지 추방해버린다. 이들의 잘못된 윤리는 자신도 그런 상황으로 내몰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다가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형성된다. 정직하게 열심히 살면 그럴 일 없다는 생각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사회일수록 개인에게 깊게 심어놓는 사이비 믿음이다. 실제로 우리사회에서 이전에 부랑인으로 불리던 사람들이 노숙인으로 불리며 대거 등장한 계기는 1997년 이른바 IMF사태다. 대한민국 노숙인은 기본적으로 사회구조적 개념이다. 25년이 흐른 오늘, 한 노숙인이 다른 한 노숙인을 위해 쓴 추도사가 새삼스럽게 통념을 부수며 들이닥친다.

 

주디스 버틀러는 거꾸로 접근한다. 공적으로 광장에 모인 신체들이 끈질기게 머문 채 귀가를 거부하는노숙은 사적 영역에 머물러야 하는 필요들을 밤이고 낮이고 광장으로 표출시킴으로써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사이 구분을 극복하려 한 방법이라 한다.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이 괴리된 혁명은 혁명일 수 없다는 통찰이 전제되어 있다. 옳다. “국가 정당성을 논하는 거대담론이 잠자는 순간에까지 삼투되지 못한다면 혁명은 그 성공이 곧 실패다. 같은 이치로 나태하고 게을러노숙인 되지 않았다는 깨달음이 요원의 불길로 번지지 못한다면 개인 각성은 그 밝음이 곧 어둠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추도사는 노숙인, 나아가 노숙인과 다름없는 민중을 깨우는 격문이어야만 한다.

 


사진: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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