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들이 만든 거대한 세계 - 균이 만드는 지구 생태계의 경이로움
멀린 셸드레이크 지음, 김은영 옮김, 홍승범 감수 / 아날로그(글담)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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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 관점에서 보면 균사체는 서로 이어진 한 존재다. 균사 정단 관점에서 보면 균사체는 복수 개체다.(95)

 

균사체 조율작용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균사체는 통제센터가 없기 때문이다. 목을 치거나 심장을 적출하면 인간은 죽는다. 균사체 네트워크는 머리도 없고 심장도 없다. 곰팡이도 식물과 비슷하게 탈-중앙 유기체다. 곰팡이에게는 운영센터도 없고, 수도首都도 없고, 정부도 없다. 통제기능은 분산되어 있다. 균사체 조율은 동시에 모든 곳에서 일어나며 어느 특정한 곳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균사체 조각 하나만으로도 균사체 전체를 재생할 수 있다. 즉 개별 균사체 하나는감히 말하건대거의 불멸이다.(99)

 

식물과 비슷하게란 말 없어도 대부분 그대로 식물에게 해당하는 내용이다. 이치대로 한다면 식물과 비슷하게가 아니다. 식물이 곰팡이에게서 그 생명 원리를 이어받아 진화했으니 말이다. 그 과정에서 조각 하나만으로도.......전체를 재생할 수 있불멸성만은 퇴화되었다. 이 경로 경사는 동물을 거쳐 인간에 이를수록 더욱 가팔라졌다. 그 반대 경로가 낳을 결과를 상상해보면 깊은 이해 없이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최근에야 인간은 곰팡이와 식물이 지닌 놀라운 진실을 어려운 연구 끝에 알아냈고, 더 놀라운 진실을 향해 갈 길이 여전히 먼 상태다. 그런데 조각 하나만으로도 전체를 재생할 수 있는 불멸성이 아닌 몸 생명인 인간은 곰팡이 진실을 전혀 알 수 없었던 수천 년 전에 어떻게 서로 이어진 한 존재복수 개체를 일치시킬 수 있었을까? 화엄경이 설파한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지혜는 어떤 경로로 인간에게 들어왔을까?

 

과학이든 사유든 모든 진리진술은 진리에 대해 근사치(언저리값)임을 면하지 못한다. 과잉근사치(부풀린 언저리값)든 부족근사치(모자란 언저리값)든 진리 주위를 서성이기는 마찬가지다. 전자가 대개 명상이나 환각물질로 도달한 직관 소산이라면, 후자는 분석적 연구로 도달한 추론 소산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전자는 자신이 포착한 진리근사치가 부풀려졌다는 사실을 모른 채 실재세계가 그렇다고 믿는 신비주의에 빠지기 십상이다. 후자는 자신이 포착한 진리근사치가 모자란다는 사실을 모른 채 실재세계가 그렇다고 우기는 환원주의에 빠지기 쉽다. 화엄경이 드러낸 진리 명제를 서구 과학이 밝혀낸 그것보다 수천 년 앞섰다며 자랑하는 일이 어이없는 이상으로 과학만이 진리를 드러내는 바른 길이라며 자부하는 일도 가소롭다. 이 극단을 버린 中道, 正道거의라는 말 한마디에 있다.

 

거의는 어떤 기준에 매우 가까운 정도[명사] 또는 정도로[부사]로 사전적 의미가 매겨진다. 지나친 천착과 완벽을 물리고 확률분포 상태에 머문다는 뜻과 근사치라는 뜻을 함께 지닌다. 비슷한 우리말은 얼추. 물론 이 두 말의 어미 말은 ᄒᆞᆫ이다. 한자로는 혹이다. 영어로는 ABOUT. 이들 어휘가 세계 진실을 실재로 드러내는 가장 근사한표현이다. 이 근사한(!) 경지에 도달한 삶과 생각 체계가 다름 아닌 ᄒᆞᆫ 사상이다.

 

ᄒᆞᆫ 사상은 전문화된명상이나 환각물질에 의존하지 않은 경험 직관과 전문화된과학에 터하지 않은 풀뿌리 과학이 만나 화쟁으로 빚어낸 진리진술이다. 원효 사상이 그 결실이며, 원효 사상은 유구한 ᄇᆞ리전승에 젖줄을 대고 있다. ᄇᆞ리전승은 비정比定된 장엄진리와 거의닮아 있는 우아함, 거기 거의닿으려는 숭고함이 비대칭대칭으로 드러나는 ᄇᆞ리 도정에다 비애와 골계를 짜넣어 거의 불멸내러티브가 되게 했다.

 

시인 이영광은 시는 어떻게 오는가<진실에 불과하지 않은>에서 말했다.

  정확한 것을 부정확하게 말하는 것은 오류지만,

  부정확한 것을 정확하게 말하는 것은 폭력이다.

  정확한 것을 정확하게 말하는 것이 능력이라면,

  부정확한 것을 부정확하게 정확히 말하는 것은,

  어떤 종류의 초능력일 것이다.

 

정확 불멸 화엄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부정확 불멸 곰팡이세계가 존재할 뿐이다. 우리는 거의참여하고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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