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향모를 땋으며 - 토박이 지혜와 과학 그리고 식물이 가르쳐준 것들
로빈 월 키머러 지음, 노승영 옮김 / 에이도스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달랑거리는 물방울에 내 얼굴이 비친다. 어안렌즈여서 이마가 커다랗고 귀가 조그맣다. 너무 많이 생각하고 너무 적게 듣는 우리 인간 모습이 꼭 똑 저렇다. 주의를 기울이는 일은 우리 아닌 지적 존재에게서 배울 바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다. 귀를 기울이고 목격자가 되면 세계를 향한 문이 열리고 우리를 가르는 벽이 빗방울처럼 녹아내릴 수 있다. 물방울이 개잎갈나무 끄트머리에서 부푼다. 축복을 받듯 혀로 물방울을 받는다.(439쪽)
아주 오랫동안 상담을 한 청년이 있다. 그는 “이마가 커다랗고 귀가 조그맣다. 너무 많이 생각하고 너무 적게 듣는 우리 인간 모습” 전형이다. 너무 많은 자기 생각으로 번역하는 방식을 통해 그는 내 언어처방에 귀를 닫았다. 치밀한 영악함으로 나를 속이면서도 그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그가 몽긋대기만 할 뿐 핵심적인 부분에서 전진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는 그 자신도 이런 문제를 알게 되었으나, 또 다시 꼼수를 동원해 무마하려 들었다. 나는 그의 꼼수를 냉정하게 지적하고 단호히 물리쳤다. 더 이상 언어적 방식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특단 처방을 내렸다.
“2주 동안 상담을 중단한다. 생각, 독서, 글쓰기, 예술 감상, SNS를 금한다. 주 5회, 속보로 3킬로미터를 걷는다. 주 3회, 느낌이나 의미 따지지 말고 무조건 숲에서 일정 시간 동안 머문다.”
나는 더 이상 그, 정확히는 그의 생각과 언어에 희망을 품지 않는다. 결국 마지막으로 그의 몸과 낭/풀에 의지해보려고 상담치유자로서는 항복 선언이나 다름없는 처방을 택했다. 그가 몸 움직임을 통해 번다하고 교묘하게 병든 생각을 어루만질 수 있기를, 낭/풀에게서 듣는 본성을 배울 수 있기를 기다린다. 낭/풀의 귀가 커지는 풍경을 상상하는 이상으로 신뢰하면서.
당신이 아는 나의 이야기도
당신이 모르는 나의 이야기도
당신이 알 수도 모를 수도 있는 나의 이야기도
내가 알거나 모르는 당신의 이야기도
비로 내린다
비가 내린다
누군가의 피로 자기 피를 만들지 않는
식물들의 귀가 커진다
어떤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와
함께 내리는 날
여기―안쪽에선 비 오는 날이라 하고
여기―바깥에선 위로와 정화의 날이라 한다
내가 아는 당신의 이야기와
내가 모르는 당신의 이야기와
내가 알 수도 모를 수도 있는 당신의 이야기와
당신이 알거나 모르는 나의 이야기
비로 내린다
비가 내린다
김선우 제6시집 『내 따스한 유령들』에 실린 <비의 열반송> 전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