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모를 땋으며 - 토박이 지혜와 과학 그리고 식물이 가르쳐준 것들
로빈 월 키머러 지음, 노승영 옮김 / 에이도스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물방울 하나하나는 이끼를 만나든, 단풍나무나 젓나무 껍질이나 내 머리카락을 만나든 생명과 맺는 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듯하다. 우리는 비를 마치 그저 하나의 사물인 듯, 마치 우리가 이해하는 바같이 그냥 비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끼가, 단풍나무가 우리보다 비를 더 잘 안다고 생각한다. 비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제각각 고유한 이야기를 지닌 빗방울들만 있을 뿐.(438~439)


 

(비 비린내 냠냠·······) 오늘 내게 말 붙인 유령입니다·······

아 그렇지 이거 비 냄새······· (응응 비 냄새 냠냠냠·······)

 

·······

 

(염려 말아요 오늘은 비······· 비 냄새 냠냠냠·······) 비 묻은 몸을 터는 강아지들 코끝에서 따스한 유령들이 강아지 따라 통통 몸을 턴다

 

김선우 제6시집 내 따스한 유령들에 실린 <내 따스한 유령들> 맨 앞과 맨 뒤 문장들이다. 유령이 비 냄새를 맡고 시적 화자에게 말 붙여 오며, 시적 화자는 강아지 코끝에서 몸을 통통 터는 유령을 본다. 유령은 비존재가 아니라 비가시적인 존재다.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는 시적 화자는 존재하지 않는 비 아닌 제각각 고유한 이야기를 지닌 빗방울을 하나하나 만나는 이끼, 단풍나무와 같다. 이끼, 단풍나무가 비를 더 잘 알듯 시적 화자는 인간 실재를 더 잘 안다. 유령이 또 다른 양태의 인간 실재라면 누군가는 반드시 그 음성을 듣고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제각각 고유한 이야기를 지닌 채 죽은 자 하나하나와 대면하는 네트워킹이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주의 너머 과학, 신비주의 너머 신비다.

 

우치다 타츠루는 소통하는 신체(민들레, 2019) 4장 말미부터 시작해 제5<죽은 자의 메시지를 듣는다>에서 죽은 자, 그러니까 유령과 소통하는 문제를 철학적으로 본격 거론했다. 볼 수 없는 신체로 존재하면서 들을 수 없는 말을 건네 오는 자들과 소통하려는 노력이 인간 윤리를 구성하는 근거로 작용한다는 이야기가 내게 준 울림은 두 가지다. 우선 사회정치적 이유로 죽임당한 자들의 해원 문제에 영적 차원 접근을 가다듬도록 자극했다. 7년 동안 끌어안고 있는 4·16 문제에 이런 통찰이 적용 가능해졌다: 4·16 죽임 사건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제각각 고유한 이야기를 지닌 이백오십 명 4·16 죽임 당한 아이들만 있을 뿐이다. 4·16을 역사에서 지우려는 자들의 술수 핵심은 4·16을 추상화해 통째로 날려버리는 것이다. 이 음모를 저지하려면 이백오십 명 아이들 하나하나를 호명해 이야기를 듣는 일이다.

 

이 책을 찬찬히 음미하는 사이 나는 낭/풀 공부에 들어갔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4·16아이들과 낭/풀을 잇기 시작했다. 전자는 죽었으니 비존재고, 후자는 살아 있다는 사실이 무의미하니 비존재다. 전자는 생명계가 같아도 생애계가 우리와 다르고, 후자는 생애계가 같아도 생명계가 우리와 다르다. 전자는 다른 생애계 언어로 말해서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고, 후자는 다른 생명계 언어로 말해서 우리가 알아듣지 못한다. 전자는 다른 생애계면서도 우리 윤리를 구성하는 근거고, 후자는 다른 생명계면서도 우리 윤리를 구성하는 근거다. 이들이 근거지운 윤리에 따르면 이들의 알아듣지 못하는 말 듣기를 끝내 멈추지 말아야 우리는 인간다운 인간이다. 인간다운 인간은 이끼, 단풍나무가 빗방울 알 듯 산다.

 

 * 참고로, 타츠루는 나무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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