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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모를 땋으며 - 토박이 지혜와 과학 그리고 식물이 가르쳐준 것들
로빈 월 키머러 지음, 노승영 옮김 / 에이도스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나를 넘어선 모든 존재 빼고 오로지 내게만 집중하게 만드는) 사방 벽을 무너뜨리고 감각 일깨우는 데 빗속에 서 있기 만한 일은 다시없다. 안에서 밖을 내다보며 젖은 세계에서 혼자만 마른 채인 고독을 견딜 수 없다. 이곳 우림에서 나는 수동적으로 보호받는 비의 방관자에 머무르고 싶지 않다. 폭우의 일부가 되어 발밑에서 꼼지락거리는 시커먼 부식토와 함께 푹 젖고 싶다. 북슬북슬한 개잎갈나무처럼 빗속에 서서 껍질 안으로 스며드는 물을 느끼고 싶다. 우리를 가르는 장벽을 물이 녹여줬으면 좋겠다. 개잎갈나무가 느끼는 바를 느끼고 개잎갈나무가 아는 바를 알고 싶다.
하지만 나는 개잎갈나무가 아니.......다.(432쪽)
‘나무를 사랑해 나무가 된 물’인 버드나무에 빗대어 내가 스스로 ‘사람을 사랑해 사람이 된 나무’라 여긴다 했더니, 김선우 천하시인이 자신은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데 어쩔 수 없이 사람이 된 나무‘ 같다고 한다. 시인은 그 말끝에 ㅜㅜ를 붙였다. 사랑이라는 말을 두고 시인과 내가 서로 맞은편에 선 곡절이 실한 궁금증을 자아내기에 나는 생각에 잠긴다. 한소끔 되작이니 한 소식 들려온다.
시인에게 사랑이란 몸 감응이다. 몸 감응으로 세계를 살아낸다. 그 삶에서 시를 창조한다. 창조는 숭고한 물질성을 띤다. 숭고한 물질성은 “나는 개잎갈나무가 아니.......다.”라는 엄밀한 진실에서 매끄럽게 벗어나지 못한다. 유체이탈을 거절하는 몸의 말은 사랑을 가볍게 마음에 태우지 않는다. 부정겸양 “않는데 어쩔 수 없이”로 사랑의 물질본성에 예를 갖춘다. 예를 갖춘 시인은 오늘 오연히 나무 앞에 선다. 오랫동안 물질옥함에 깊이 간직해두었던 정신본성을 빛으로 열기 위해서다. 정신본성과 물질본성을 불이이불수일 진리로 옹글게 하기 위해서다. 바야흐로 세계 전체성을 향한 천명이 시인의 온 마음을 깨우는 카이로스다. 지천명인 시인은 이제 개잎갈나무다.
내게 사랑이란 마음 감응이다. 마음 감응으로 세계를 살아낸다. 그 삶에서 병을 치유한다. 치유는 우아한 정신성을 띤다. 우아한 정신성은 “나는 개잎갈나무가 아니.......다.”라는 딱딱한 진실에서 말랑하게 벗어난다. 파동진리에 능숙한 마음의 말은 사랑을 가볍게 마음에 태운다. “개잎갈나무처럼 빗속에 서서” 사랑의 정신본성에 예를 갖춘다. 예를 갖춘 나는 오늘 오연히 나무 앞에 선다. 오랫동안 정신옥함에 깊이 간직해두었던 물질본성을 빛으로 열기 위해서다. 물질본성과 정신본성을 불이이불수일 진리로 옹글게 하기 위해서다. 바야흐로 세계의 전체성을 향한 천명이 내 온 몸을 두드리는 카이로스다. 이순도 훌쩍 넘어선 나는 이미 개잎갈나무가 아니어야만 했다.
나무는 다르고도 같은 목적으로 시인과 나를 초대했다. 이런 초대는 나무만이 할 수 있다. 나무와 함께 살면 일원론도 이원론도 승자독식으로 귀결된다는 진리를 생생하게 감지한다. 나무에게서 인간을 배우는 일은 근원적 진리성을 지니는 만큼 웅숭깊이 모호성을 지닌다. 시인 쪽으로 고유성이 기울면 삶을 만지는 감각에서 더 뛰어나리라 본다. 내 깨달음이 십 수 년 더뎠으니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