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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모를 땋으며 - 토박이 지혜와 과학 그리고 식물이 가르쳐준 것들
로빈 월 키머러 지음, 노승영 옮김 / 에이도스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묵은 숲은 아름다움 뿐 아니라 정교한 기능면에서도 놀랍다. 지원이 희소해지면 무차별적 성장이나 자원 낭비 같은 광란이 있을 수 없다. 숲 구조 자체의 ‘녹색 건축’은 효율성의 본보기로, 태양에너지 포획을 최적화하는 여러 겹의 숲 지붕 속에 잎들이 층을 이룬다. 자급자족하는 공동체의 본보기를 찾고 싶다면 묵은 숲을 보면 된다. 묵은 숲과 공생함으로써 생겨난 묵은 문화도 좋은 모델이다.(417쪽)
묵은 문화는 묵은 숲과 마찬가지로 아직 절멸하지 않았다. 땅에는 과거 기억과 재생 가능성이 깃들어 있다. 이는 단지 민족성이나 역사 문제가 아니라 땅과 사람 사이 호혜에서 비롯한 관계 문제다.(426쪽)
“낡지 않고 늙을 수 있는 장소에 대해 자네는 얼마나 알고 있나? 낡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새로워지는 곳, 몸이라는 장소에 관하여.”
김선우 제6시집 『내 따스한 유령들』(창비, 2021)에 실린 <몸이라 불리는 장소에 관하여> 마지막 두 문장이다. 늙되 낡지 않고 새로워지는 몸은 숲이 그 기원이다. 숲 본성을 핍진히 좇아갈수록 “자급자족하는 공동체” 의미 실재를 더욱 충실히 구현할 수 있다.
공동체로 보지 않는다면 자급자족이라는 말은 이치상 인간 몸에게 당치않다. 인간사에서 인간이 스스로 자기 몸을 공동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던가. 더군다나 식물 심지어 미생물과 공동체를 이룬다는 생각은 꿈에서도 해본 적이 없다. 꿈에서도 해본 적이 없는 생각으로 돌아가려면 묵은 숲, 그러니까 늙되 낡지 않고 새로워지는 숲의 본성으로 들어가야 한다. 숲 본성과 이루는 교집합을 계의 가장자리부터 넓힘으로써 인간 몸은 공동체성을 극상으로 번져가게 할 수 있다.
숲 본성으로 들어가기는 원리 문제가 아니라 윤리 문제다. 윤리는 구체적·물질적 참여가 이루어지는 수리를 동반한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와 더불어 실제 생명을 주고받는 감각, 정서, 의식, 수용, 행동을 낱낱이 경험함은 물론 각 맥락 속 전경을 온이 꿈꿀 수 있어야 한다.
묵은 숲이 일으키는 생명의 창발 네트워킹을 살아가는 인간이 그 본성에서 우러나온 묵은 문화를 빚을 때, 숲과 분리된 뒤 형성된 문화 핵심은 전미래 관지로 과연 어떻게 기억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