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모를 땋으며 - 토박이 지혜와 과학 그리고 식물이 가르쳐준 것들
로빈 월 키머러 지음, 노승영 옮김 / 에이도스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농사는 물질적 일인 동시에 영적 일이다.(184)

 

자연Sein으로 서술되었으되 당위Sollen에 눈길이 꽂히는 문장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여기 농사는 우리가 아는 농사가 아니다. 우리가 아는 농사는 관행농법을 따르는 산업적 농사다. 산업적 농사에 영이 있을 리 없다. 영적 일인 농사는 인간과 식물 모두를 풍요롭고 경이로운 풍경 속에 있게 한다. 풍요롭고 경이로운 풍경 속에서 인간과 식물은 서로 깃들어 길들인다.

 

식물과 사람은 서로 주고받으며 더불어 진화사를 빚어냈다.......야생식물은 반듯하게 서도록 달라졌고, 야생인간은 들판 옆에 정착해 식물을 돌보도록 달라졌다. 서로 길들이기다.

  우리는 공진화적 순환으로 연결되어 있다.......서로 진화에 선택압력으로 작용한다. 한쪽 번성은 다른 쪽에도 유리하다.(185~186)

 

한쪽 번성이 다른 쪽 번성에도 유리한, 공진화적 순환으로 연결된, 서로 길들이기로서 농사는 자연Sein 영적이다. 영성을 잃어버린 산업적 농사는 다시 이야기하기re-story-ation로 본성을 회복restoration해야 한다. 농사를 다시 이야기하려면 농사짓는 식물을 다시 이야기해야 한다. 식물을 다시 이야기하려면 식물 고유 본성과 우리가 맺는 관계를 다시 이야기해야 한다. 관계를 다시 이야기하려면 그 관계를 바라본 도구적 관지를 다시 이야기해야 한다. 도구적 관지를 다시 이야기하려면 도구로 쓴 인간 행위 본질을 다시, 새삼스럽게 이야기해야 한다. “인간 본성에서 식사는 무엇인가?”

 

2020105일판 내 답변은 이랬다.

 

나는 식물을 먹을 때 신의 공양, 그러니까 하늘이 나를 먹인다고 여긴다. 여기서 마침내 근원 질문이다. “먹는다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먹는 행위는 다른 생명을 죽여 내 생명의 일부로 다시 살려내는 역설 사건이다. 살육殺戮도 필연이고 생육生育도 필연이다. 먹는 행위는 도구적 행위가 아니다. 먹는 행위는 존재론적 행위다. 인간은 먹는 인간homo esus이다. 인간은 먹음으로써 존재를 구현한다.......먹는 행위는 거룩하면서도 즐거운 제의다. 이 제의에서 진정한 사제는 먹는 인간이 아니라 먹히는, 아니 먹이는식물 생명이다. 먹는 인간은 예를 갖추어야 한다.”(식물의 사유주해리뷰5 <생명을 망각한 문화-식물성 의식을 요청함>에서)

 

2021714일판 내 개인적 답변은 다음 둘을 보충한다.

 

(1) 식사가 제의, 곧 기억하기를 기억하는 방법이라면, 그 기억은 결국 농사에 가 닿는다.

(2) 농사와 식사가 상호 목적으로 순환하는 네트워킹에서 살기 위해 먹기먹기 위해 살기는 분리되지 않는다.

 

농사는 제의다. 제의로서 농사는 자연Sein 영적인 일이다. 영 본성을 지닐 때, 농사는 도저한 물질 본성도 지닌다. 서로 길들이기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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