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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모를 땋으며 - 토박이 지혜와 과학 그리고 식물이 가르쳐준 것들
로빈 월 키머러 지음, 노승영 옮김 / 에이도스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오클라호마 시각으로 화요일과 목요일 12시 15분에는 포타와토미어 점심 언어교실에 참가한다. 부족 본부에서 인터넷으로 진행하는 강좌다. 미국 전역에서 열 명가량이 수업을 듣는다. 우리는 숫자를 세고, “소금 주세요,”라고 말하는 법을 배운다. 누군가 묻는다. “‘부디please 소금 좀 주십시오.’라고 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언어 부흥에 매진하는 젊은 선생님 저스틴 닐리는 ‘고맙습니다.’를 뜻하는 단어는 여러 개가 있지만 ‘부디’라는 단어는 없다고 설명한다. 음식은 본디 나누는 것이므로 예의를 더 갖출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정중한 요청은 문화적으로 이미 전제돼 있다는 말이다. 선교사들은 ‘부디’라는 단어가 없는 사실을 상스러움의 또 다른 증거로 내세웠다.(085~086쪽)
문득 소동파가 떠오른다. 당송팔대가 중 한 사람인 그는 시·서·화에 모두 능했다. 특히 그림은 기교를 전혀 쓰지 않기로 유명했다. 기교를 쓰지 않는 이유가 고향 아미峨眉산 뛰어난 절경 속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이라 여겨지고 있다. 인간 기교로는 자연 절경을 제대로 담을 수 없음을 아미산속 삶에서 깨달았고, 그 깨달음을 단도직입 실행에 옮겼다는 얘기리라.
“음식은 본디 나누는 것이므로 예의를 더 갖출 필요가 없다”는 말이 전해준 울림이다. 소동파가 기교를 쓰지 않는 연유와 포타와토미 부족이 ‘부디’란 말을 쓰지 않는 연유는 본질상 동일하다. 기교도 ‘부디’도 “더 갖출” 필요가 없는 사족일 뿐이다. 정확히 말하면 비례非禮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비례를 넘어 모독이다. 왜냐하면 본성을 어기기 때문이다. 기교는 아름다움에 대한 통합감각을 시각이 가로채게 한다. ‘부디’는 음식이 된 생명, 특히 낭/풀에게 가야 할 감사를 인간이 가로채게 한다. 모독은 결국 범죄다.
범죄 언어인 ‘부디’를 쓰지 않는 포타와토미 사람들을 “상스러움”에 던져버린 기독교 선교사들은 적반하장 그 자체다. 상스러움으로 치면 기독교가 음식을 대하는 태도만한 것은 다시없다. 식사기도로써 자기 자신과 음식으로 희생한 생명 사이를 이간하니 말이다. 음식이 된 생명, 특히 낭/풀에게 가야 할 감사를 신이 가로채게 하니 말이다. 설혹 신이 주었다손 치더라도 낭/풀에게 정중히 예를 다하지 못할 아무런 이유가 없음에도 저들은 그리 한다. 저들이 구가하는 그 일극집중 언어·사유가 저들을 성스러움에서 상스러움으로 타락시켰다.
생명이든 음식이든 식사든 본디 모두 지극히 성스럽다. 이들을 도구화하고 향락화한 인간이 그 더러움과 어두움을 가리려 짐짓 정중 떨며 ‘부디’라는 말을 쓰면 쓸수록 상스러움은 쌍스러움으로 증강된다. 부디 ‘부디’를 인간에게나 신에게 쓰지 말고 음식에게, 특히 낭/풀 생명에게 쓰기를 간절하게 빈다. 부디 가지고는 정성이 부족한가. 그러면 이 말을 보탠다: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