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모를 땋으며 - 토박이 지혜와 과학 그리고 식물이 가르쳐준 것들
로빈 월 키머러 지음, 노승영 옮김 / 에이도스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영어는 체언 중심 언어여서 주어에 집착하는 문화에 알맞다.......종종 체언에 성별을 부여하지만 포타와토미어는 세상을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지 않는다. 체언과 용언 둘 다 유정과 무정으로 나뉜다.(087)

 

만물이 살아 있는 세계에서는 전부 용언이 될 수 있다. 언어는 물, 땅, 심지어 날에 이르기까지 유정 세계를 보는, 만물에서 맥박 치는 생명을 보는 거울이다.......

  이것은 유정 문법이다.......포타와토미어 개론에서는 바위가 유정이다. 산, 물, 불, 장소도 마찬가지다. 정령 깃든 물체, 성스러운 약, 노래, 북, 심지어 이야기도 유정이다. 무정 목록은 그보다 적은데, 대부분 인간이 만든 물건이다.(090~091)

 

영어는 유정을 존중할 수단이 많지 않다. 영어에서는 인간 아니면 사물이다.......어쩌면 문법은 상호관계를 반영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유정 문법은 세상을 살아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인도할지도 모른다. 다른 종을 주권자로 대우하고 종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세상, 물과 늑대에게 도덕적 책무를 지는 세상, 다른 종 처지를 고려하는 법률체계를 가진 세상 말이다.(092~094)

 

이 장소에 토박이가 되려면, 이곳에서 우리와 이웃이 살아남으려면, 유정 문법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만 이곳에서 진정으로 뿌리 내릴 수 있다.(095~096)


 

어린 시절 웃자란 감성으로 구성지게 부르곤 했던 트로트, 박재홍(1924~1988)<유정천리>(1959)가 문득 떠오른다. 동명 영화 주제가여서 가사에 그 줄거리가 담겨 있다. 2절 가사 마지막 부분이 유정천리 꽃이 피네. 무정천리 눈이 오네.”. 여기 유정 무정과 로빈 월 키머러의 유정 무정은 물론 다르다. 문맥을 일단 밀어두면 온전히 같은 뜻으로 새길 수 있다. 그렇다. 유정 천리엔 꽃이 피고, 무정 천리엔 눈이 온다. “다른 종을 주권자로 대우하고 종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세상, 물과 늑대에게 도덕적 책무를 지는 세상, 다른 종 처지를 고려하는 법률체계를 가진 세상엔 꽃이 피고, “인간 아니면 사물로 나뉘는 세상엔 눈이 온다.

 

인간 아니면 사물로 나뉘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영어가 지구를 정복해가는 과정이다. 영국과 미국이 차례로 패권국가가 되면서 영어도 패권언어가 되었다. 언어패권이 정치패권보다 무섭다. 언어가 사유와 행위를 지배하는 힘은 외적 강제가 아니라 내적 원리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영어를 말하는 순간부터 체언 편향으로 사유한다. 체언 편향으로 사유하는 순간부터 인간은 유정이고 나무는 무정이므로 대놓고 함부로 벤다. 나무 베듯 이룩한 과학혁명, 산업혁명, 가격혁명이 착취적 세계체계를 만들었다. 착취적 세계체계에서는 나무뿐 아니라 제3세계 인민, 유색인종, 여성, 아동, 성소수자, 비정규직 노동자.......도 무정 되고 만다.

 

영어가 만든 무정 중첩 세계체계는 인간을 영원한 떠돌이로 만든다. 토박이로 뿌리 내려 더불어 살려면 유정 문법을 배워야 한다. 유정 문법 언어는 중첩적 계층을 만들지 않는다. 누구든 직접 이 땅에 뿌리 내려 토박이가 되도록 한다. 토박이 언어는 그렇게 용언 지향 사유를 이끈다. 용언 지향 사유는 세계를 동사와 형용사로 풀어 놓는다. 형용사는 유정 문법 언어에서 동사에 가깝다. 한국어는 근본적으로 유정 문법 언어다. 유정 문법 언어인 한국어 오염은 무정 문법 언어인 영어 단어 무분별 유입 차원이 아니다; 형용사가 동사를 떠나 명사에 가 붙는 언어 매판 차원이다. 언어 매판은 비가역적이다. 꽃 피는 유정천리로 되돌아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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