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모를 땋으며 - 토박이 지혜와 과학 그리고 식물이 가르쳐준 것들
로빈 월 키머러 지음, 노승영 옮김 / 에이도스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80세 노인이 압박골절 통증으로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는 상태에서 침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나흘째 되는 날 보니 제법 원기도 회복되고 눈동자가 맑아졌다. 시침 중간 뚜벅 이렇게 말한다. “수지침하고 똑 같구먼!”

 

매판 지배세력이 여전히 준동하는 세상에 길들여진 대중은 한의사를 의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침쟁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경로당에서 경험한 수지침이나 한의사가 놓는 침이나 침이긴 매일반이라고 여길 만하다. 누구든 자기 코로 세계 냄새를 맡기 마련이다. 거기 취하는 사람이 있고, 거기서 번져 가는 사람이 있다는 차이뿐.

 

우리 낭/풀 전승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이 책을 읽기 시작한 한참 뒤에도 향모를 알지 못했다. 읽어 나아가면 책 속에 그 설명이 있으리라 막연히 기대할 뿐이었다. 이 책 구성원리를 먼저 검토하고 읽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착오였다. 이 책 구성원리가 여느 책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뒤에야 향모를 더듬어보기 시작했다.

 

저자는 향모에서 바닐라 향이 난다고 했지만 내가 찾은 자료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레몬그라스였다. 레몬이란 말을 이상히 여기면서 나는 레몬그라스를 구해 향을 맡아보았다. 레몬 향과 같기 때문에 레몬그라스라는 이름을 붙인 사람 코와 다른 코가 내게 있었으므로 나는 그 냄새가 살아 있는 벼 대궁에서 나는 냄새와 본질이 같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물론 바닐라 향도 또 다른 사람 코로 맡은 향이다. 완전히 동일한 풀이 아니어서 각각 자기 코가 더 정확할 수 있다. 내 코로 맡은 향모 향은 모름지기 레몬만도 아니고 바닐라만도 아닌 경계 냄새다. 아직 미지 생명으로 내 밖에 있지만 향모, 정확히는 향모라는 생명 장은 이미 소중하고 각별한 향으로 내 안에 들어와 있다. 고마운 일이다.

 

내게는 향모를 땋는 전승이 없다. 구태여 그 형식 자체에 참여할 필요는 없다. 저자 전승에서 향모를 심고, 키우고, 뽑고, 땋고, 태우는 과정이 건네는 은유를 내 전승에 맞는 생생한 물질의미로 받아들여 따르는 길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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