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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은 위대한 화학자 - 잃어버린 식물의 언어 속에 숨어 있는 생태적 의미
스티븐 해로드 뷔흐너 지음, 박윤정 옮김 / 양문 / 2013년 9월
평점 :
품절
지구상에 존재하는 것으로 추산되는 약 275000종의 식물은 제각각 수백에서 수천 가지 독특한 화학물질을 함유하고 있다. 그 결과 식물종의 대다수는 수많은 다른 개체로 발현하고, 이들 모두 그 종의 화학적 주제에 따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서로 다른 변이와 결합을 만들어낸다.......이 결합체들이 합성되면 그 화합물은 다른 생명체들의 화합물과 반응해 예측할 수 없는 시너지를 일으킨다. 거기다가 작용량이 달라지거나 작용과정에서 미세한 변화만 있어도 전혀 다른 결과가 만들어진다. 요컨대 우리는 식물의 화학작용에 대해서 극히 일부분밖에 모르고 있는 것이다. 식물을 생각도 감정도 없는 먹을거리거나 목적도 의미도 없이 우연히 일어나는 화학적 생산과정의 재료 정도로 받아들이는 사고방식이 이런 무지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기에 식물이 있다.(196~197쪽)
“그러거나 말거나 지구는 엄연히 낭·풀의 공화국이다.” 마지막 문장을 나는 이렇게 번역했다. 아무리 인간이 진화의 정상이니 신의 형상이니 유일한 지성이니 떠들어도 낭·풀에 대한 무지로 따지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미물에 지나지 않는다. 저 도저한 무지는 대체 어디서 온 걸까?
인사동9길과 12길 사이 인사동길의 가로수는 버드나무 다섯 그루다. 종로구청이 버드나무를 가로수로 작정하고 심었을 리 없다. 본디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왜 저 곳에 하필 버드나무가 일렬로 서 있을까? 사실 40년 동안 수없이 인사동을 오갔는데 의문을 품은 적이 없었다. 지난 몇 달 낭·풀 공부를 하면서 버드나무 생태를 알게 되자 관심이 날카롭게 솟아오른 것이다.
버드나무는 본성상 물을 좋아한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에서 고정희는 버드나무를 “나무라기보다는 나무로 변한 물”이라고까지 표현했다. 당연히 버드나무는 물가에 산다. 고정희의 표현을 다시 빌리면 “물과 뭍의 경계에 서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사동길에 본디 개천이 흘렀다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나는 즉시 추정에서 확인으로 가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결국 인사동길이 청계천과 합류해 한강으로 흘러드는 개천을 따라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복개로 개천이 사라진 뒤의 풍경을 본디 풍경으로 알고 드나든 지난 40년이 못내 부끄러웠다.
남에게는 사소한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을 이 일을 품고 나는 한동안 상념에 잠겼다. 삶, 아니 사람 그 자체가 결국은 이야기다. 이야기는 사태나 사물을 가치매기는 앎의 구성이고, 앎은 관지position of view를 반영하며, 관지는 관심사에 따라 결정된다. 관심사라는 말은 이성적 뉘앙스로 주의를 흩트리지만 그 본진이 다름 아닌 사랑이다. 사랑은 분리·고립 이후 인간이 합일·소통을 복원하기 위해 일으키는 앎의 매혹이다. 앎의 매혹은 사랑의 상대를 자기 발아래에 두고는 발생하지 않는다. 인간의 낭·풀에 대한 무지는 여기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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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마음 따스한 분이 버드나무 다섯 분께 겨울옷을 입혀 드렸다. 과학은 이럴 때 다른 설명을 한다. 그 다른 설명이 맞기는 한데 함량 미달인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런데 왜 구태여 저리도 예쁘게 정성스럽게 만들었을까?’ 라는 질문에 ‘이왕이면.......’ 하고 답할 수밖에 없는 구차함과 과학은 어울리지 않는다. 지금쯤이면 겨울옷을 벗겨드렸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