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블루 in 그린세러피




000. 끝낼 수 없는 이야기

 

아무것도 질문하지 말고 아무것도 의도하지 말고 숲으로 가서 그냥 한 시간가량 머물다 올 것.” 8년 동안 400번 상담한 어떤 사람에게 저는 지난 주 불문곡직의 숲 처방을 내렸습니다. 불가피한 불가항력이 제 과단성을 일깨우는 찰나, 불현 듯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이 결정은, 적어도 그에 관한 한, 언어적 소통과 정서적 공명과 인격적 감응의 한계를 스스로 설정하고 내린 처방입니다. 제 치료의 본성을 계의 경계 넘어 식물의 본성으로 정향하는 전향입니다. 더는 붓다와 그리스도를 꿈꾸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이후 인간 차원의 곡진·결곡한 시도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푸나무 본성이 배어들어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푸나무 본성은 무엇일까요? 평등·화평·평범한 전방위·전천후의 분산 시스템으로 소미한 공동체의 네트워킹을 일으켜 군집한 지성의 창발이 솟아오르게 하는 생명 실재가 푸나무 본성입니다. 이것을 인간의 용어로 표현하면, 신성이고 불성이고 영성입니다. 아니. 이것이 신성이며 불성이며 영성입니다. 인간의 숭고가 지향하는 장엄의 고향은 푸나무 본성입니다. 푸나무 고향에 복귀하여 온전히 참여하려면 인간은 인간적 편향과 오만의 분리거점을 지워야 합니다. 분리거점에는 대문자 일자the One가 좌정하고 있습니다. 대문자 일자가 허위본성의 본진입니다. 허위 신성·불성·영성을 푸나무 본성으로 정화해서 인간의 참 본성을 되찾아야 합니다.

 

명상이든 참선이든 기도든 진화 방향의 연장선에서 초월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이 지은 분리문명의 산물 일부를 분리정신 안에서 분리된 정신을 고양함으로써 해결하려는 가소로운 노력, 그러니까 사실상 방어기제에 불과합니다. 문제의 해법을 문제가 야기된 그 타령으로 찾아서는 안 됩니다(앨버트 아인슈타인). 인식과 실천이 함께 파천황의 전복을 일으켜야만 합니다. 분리문명이 발달시킨 어떤 의학으로도 분리가 야기한 질병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분리정신이 고안해낸 어떤 수행법으로도 분리가 야기한 윤리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분리 자체를 괄호 로 묶는 단 하나의 길이 있을 뿐입니다. 그 단 하나의 길이 바로 푸나무 본성에 있습니다.

 

푸나무와 대화하는 이른바 약초치료사가 미국의 경우 수천 명에 이릅니다. 전문가 아닌 사람도 그리 어렵지 않게 이 대화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생태 문화적 전통이 만든 예외일 수도 있지만 분명 경이롭고 고무적인 일입니다. 과학을 빙자해 사이비로 모는 것에 반대합니다. 제가 주의하는 바는 그들이 푸나무를 영으로 대하는 문제입니다. 영이라면 본디 식물이 영이고 그 영에 인간이 겸허히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 보면 식물도 영이야!’ 수준인 한, 인간중심적 표상 방식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중심적으로 표상된 푸나무 기호가 형식화한 인간의 삶은 또 하나의 방어기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관건은 개별적 대화와 치료가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푸나무와 대화하고 그로써 치료할 수 있는가를 넘어 어떻게 하면 푸나무 본성에 깃들 수 있는가를 고민합니다. 그린세러피 이야기는 푸나무 후천개벽을 추동하는 격문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푸나무 후천개벽은 인간 생명과 사회가 평등·화평·평범한 전방위·전천후의 분산 시스템으로 소미한 공동체의 네트워킹을 일으켜 군집한 지성의 창발이 솟아오르게 만드는 일입니다. 푸나무 없이는 후천개벽 아니고, 후천개벽 아니면 푸나무 참여는 없습니다. 제 이야기는 이제 막 출발했습니다. 원효와 바리를 붙들고 살아온 지난 45년의 터전 위에 푸나무 후천개벽으로 제 본성의 집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이 끝낼 수 없는 이야기는 앞으로도 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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