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블루 in 그린세러피



  (8) 그린 식사-코로나블루 치료하기 위해 뭘 먹으면 좋을까 하는 문제라면 이미 그린 약물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약식동원藥食同源을 말하는 동아시아 전통의학 입장에서 보면 구태여 식사 이야기를 처방 부분에 올릴 필요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구태여 식사 이야기를 처방 마지막 부분에 올리는 이유는 <1. 코로나블루, 올 것이 왔다>에서 말씀드렸던 먹는 행위의 종말론적 윤리 정립 문제를 처방 차원의 강령으로라도 구성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와 코로나블루가 이렇게까지 강력하게 지구 전체를 몰아붙일 수 있는 힘의 중요한 진원은 바로 문명 이후 인간이 전승시킨 잘못된 식사 인식과 태도입니다. 그것을 전복해야 합니다.

 

김선우의 사물들에서 천하시인 김선우가 말했습니다. “먹는다는 일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에게, 살아 있기를 희망하는 존재들에게 필연적으로 부과되는 일.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존재의 치명적인 약한 고리이며 그리하여 먹는 일과 먹이는 일은 도덕적, 미학적 가치 부여 이전에 그 행위 스스로의 위엄으로 순결해진다.”(17) 저는 이 구절을 떠올릴 때마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먹는 일과 먹이는 일의 인식을 존재의 지성소에 가장 핍진하게 육박시킨 절창입니다. 정색하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인간은 스스로의 위엄으로 순결해지는 먹는 일을 스스로 모독하고 있지 않습니까?

 

모독의 증거가 차고도 넘치지만 무엇보다 신랄한 것은 살기 위해 먹는다고 생각하는 착오입니다. 착오를 넘어 오만입니다. 오만을 넘어 죄악입니다. 죄악을 직시할 때 비로소 모든 생명은 먹기 위해 살아간다는 진실의 위엄을 목도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의 위엄으로 순결해지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아 살아가는 생의 감각과 원칙을 복원하려면 인간 현실의 죄악성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인간은 너무나 대놓고 너무나 함부로 너무나 많이 너무나 비윤리적으로 너무나 불의하게 먹어대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가난한 아이들은 수없이 굶어죽는데 부자나라 부자들에게 더 많은 붉은 살코기를 제공하기 위해 아마존을 불사르는 것이 현실입니다.

 

살기 위해 먹는다는 인간이 벌여 놓은 현실은 도리어 중독(향락)적으로 먹기 위해 살아가는 형국입니다. 채취수렵시대나 원예농업시대를 살 때까지 인간은 확실히 먹기 위해 살았습니다. 채취 황홀, 수렵 황홀은 먹는 일과 먹는 대상에 대한 제의적 감각과 원칙이 작동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스스로의 위엄으로 순결해지는 식사가 생의 목적이었습니다. 문명 농업이 시작되면서 식사는 화폐와 권력에게 목적의 자리를 내주고 수단으로 전락해갔습니다. 수단이 된 식사는 신성을 잊고 쾌락에만 복무합니다. 푸드 포르노 세상이 열린 것입니다. 푸드 포르노는 동식물 멸종을 포함한 생태계 파괴·기후 재앙·질병 창궐의 지옥문을 열어젖혔습니다.

 

그 지옥문으로 코로나19, 코로나블루가 들어왔습니다. 코로나블루를 어루만져 풀어내는 그린 식사는 스스로의 위엄으로 순결해지는 제의로 복귀합니다. 그린 식사는 동물권을 보호하려고 식물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그린 식사는 식물권을 보호하려고 동물을 먹지 않는 것입니다. 그린 식사는 포식하지도 남기지도 않습니다. 그린 식사는 맛을 향락적으로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린 식사는 좋다는 것들을 그러모은 종합 영양제가 아닙니다. 그린 식사는 사람마다 다른 건강 상태와 질병의 정황을 보고 각기 다르게 식단을 구성합니다. 그린 식사는 코로나블루 시대의 윤리와 정의와 영성을 긴절하게 담아냅니다. 이것이 그린 식사의 강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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