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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사유 - 식물 존재에 관한 두 철학자의 대화
루스 이리가레.마이클 마더 지음, 이명호.김지은 옮김 / 알렙 / 2020년 8월
평점 :
이리가레: 나는 동반자를 향한 갈망이 참으로 순수하고 강렬했던 두 순간이 기억납니다. 두 번 모두 내가 자연과 교감을 나누며 충만함을 느꼈을 때 일어났습니다........지복이라고도 할 수 있는 더 완전한 나눔에 대한 갈망을 일깨웠던 것은 ‘내가 온전히 살아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우리의 삶이 이랬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선악에 대한 지식을 전유한 척 가장하기 전에 인간을 포함한 자연을 신의 선물로 찬양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문제는 만물을 판단하려는 욕망이 아니라 행복을 나누는 것이 되었어야 하지 않을까요?(92쪽)
마더: 창세기에 나오는 제2 창조.......이야기에는 숨은 약속이 들어 있습니다. 이 둘째 이야기에서 이브는 가망 없는 고독에 시달리는 아담을 구하러 옵니다. 그녀는 아담의 구세주입니다. 이브의 역할을 묘사하는 ‘ezer라는 단어는 ’조력자‘로 허술하게 번역되어 있는데, 이 단어는 신이 우리에게 베푼 것과 같은 구원과 해방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최초의 여성은 최초의 메시아였습니다. 인간 동반자를 향한 아담의 향수는 자신과 다르고, 자신에게 말을 걸고 걸어지며, 자신과 함께 에덴동산을 가득 메우고 있는 다채롭고 경이로운 동식물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타인의 구원을 통해 해소될 수 있습니다.(248~249쪽)
이리가레: 나의 인간적 조건을 취하면서 식물과 생생한 교감 상태에 머무르려면 성차화된 속성의 초월을 체화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인간 동반자를 갈망한다는 것은 초월을 몸으로 체화할 필요성뿐만 아니라 그것을 갈망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95쪽)
마더: 자연 속에 있는 것은.......폭 넓은 트랜스휴먼 공동체를 만들어낼까요?(246쪽) 우리가 자연세계와 나누는 공명은 다른 인간과 나누는 공동 공명이 되지 않으면 결함이 있는 것 아닐까요?(247쪽) 휴먼 공동체는 식물 세계의 주위에서 어떻게 자라고 무르익어 갈까요?(253쪽)
우종영의 『나는 나무에게서 인생을 배웠다』 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나무와 사람의 차이가 뭘까요?”
.......그는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조금 어눌하지만 정확하게 말했다.
“나무는 싸우지 않아요.”
놀랍게도 그 친구의 대답은 그날 강의의 핵심이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거나 남의 것은 빼앗지 않고 스스로 필요한 것을 만들 줄 아는 평화의 기술자가 바로 나무니 말이다.(175쪽)
아스퍼거증후군 상태로 숲 해설가 양성과정에 참여했던 동혁이 이야기다. 아스퍼거증후군은 정서적 교감에 문제가 있어 지속적 사회관계 형성이 어려운 자폐 계열 정신장애다(DSM-5에는 포함되지 않음). 정서적 교감에 문제가 있어 지속적 사회관계 형성이 어려운 동혁이가 어떻게 저런 대답을 했을까? 동혁이가 남이 가르쳐준 것을 외워서 말했다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 “싸움”에 대한 정서적 태도가 분명하다. 당연히 나무에 대한 정서적 태도도 분명하다. 증거는 이렇게 확립된다.
그러던 어느 날 동혁이 어머니로부터 예상 밖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여느 때처럼 사람들과 함께 산을 오르고 있는데 잘 따라오던 아이가 갑자기 보이지 않더란다. 서둘러 찾아보니 아이는 일행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웬 나무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놀란 가슴을 다독이며 다가가 가만히 손을 잡으니 동혁이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무가 아파요,”
나무는 병충해를 입었는지 부스럼투성이 몸통에 가지마저 부러져 있었다. 이윽고 동혁이는 어머니의 손을 놓고 나무를 안으며 속삭였다.
“너도 나처럼 아프지? 괜찮아. 나아질 거야.......”
이야기를 전하는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눈물이 묻어 있었다. 병원에서도, 학교에서도 꽁꽁 닫혀 있던 아이의 마음이 나무 한 그루 앞에서 활짝 열린 것이다.(176~177쪽)
이리가레의 교감과 마더의 공명이 이와 본질상 동일하지 않을까. 싸우는 인간 세계에서 쫓겨나 닫혔던 마음이 싸우지 않는 식물 세계에서 열린 것이다. 추방은 죽임이며 포용은 살림이므로 식물 세계에서 경험한 교감은 살아 있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식물은 인간을 어떻게 포용할까? 인간은 어떻게 그것을 감지할까?
지금은 거의 사라진 풍습이지만 내 아버지 세대만 해도 상갓집 상주를 마주해서는 큰 소리로 분명하게 얼마나 슬프십니까, 뭐 이런 말을 건네지 않고 들릴 듯 말 듯, 말 아닌 말을, 건네는 둥 마는 둥, 웅얼웅얼하는 게 예의였다. 무슨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생겨난, 아니 어쩌면 숲에서 배운 슬기일 것이다.
숲이 인간에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혀 침묵하는 것은 아니다. 숲은 적료의 시공이 결코 아니다. 인간 의식이 귀를 통해 지각하지 못할 뿐 미미한 결로 세세한 겹으로 위로를 건넨다. 이것이 식물 세계의 주파수와 파장이다. 고요한 나머지 사늘하다. 고요하다고 충만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사늘하다고 온전히 살아 있는 느낌을 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이 주파수와 파장으로 공격받고 수탈당한 인간의 심신을 평화와 청안으로 인도한다. 여기가 트랜스휴먼 공동체의 맥락이며 지평이다.
트랜스휴먼 공동체의 맥락과 지평에 매몰되면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숲이 그러하듯 인간 또한 트랜스휴먼 공동체의 경험을 안고 트랜스휴먼 공동체의 맥락과 지평을 초월해야 한다. 이리가레는 성차화를 초월의 발판으로 삼는다. 마더는 메시아 이브가 아담을 구원하고 해방했다는 논리로 화답한다. 우종영의 동혁이는 어찌 되었을까?
숲을 다니며 몸과 마음의 근육을 모두 다진 동혁이는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훌륭한 식물학자가 되어 (177쪽)
동혁이는 동혁이 상황에 맞는 생의 동반자가 그때그때 있을 것이다. 언젠가 이리가레와 마더의 때가 올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리가레든 마더든 동혁이든 휴먼공동체는 식물 세계의 “주위”에서 자라고 무르익어 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동혁이 꿈 이야기 “되어” 뒤에는 이런 구절이 더 있다. “전 세계의 풀과 나무들을 만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