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의 사유 - 식물 존재에 관한 두 철학자의 대화
루스 이리가레.마이클 마더 지음, 이명호.김지은 옮김 / 알렙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리가레: 우리 전통은 우리 감각의 잠재력을 무시한 채 실재를 표상한다고 간주하는 말을 교환양식으로 전유하여 그에 의존했으며, 말을 로고스로 모아 들였습니다........그리하여 우리 문화는.......생명 존재 간의 만남에서 얻을 수 있는 에너지의 상당 부분을 포기했습니다........나무는 우리에게 시각의 잠재력을 되돌려주고, 보고 살아가는 능력과 함께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 돌려보냅니다........침묵은 우리가.......타자에게 귀 기울여 들을 수 있는 장소이자 그런 장소를 만들어냅니다. 나는 나무 잎사귀에 부는 바람의 음악을 들을 수 있고, 대기의 온기와 건도, 습도에 따라 바뀌는 나무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이 모든 것들은 나의 숨, 나의 자유, 나의 살아 있는 존재를 회복하도록 도와줍니다.(81~88)

 

마더: 우리는 식물만큼 물과 흙과 하늘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관심 범위는 더 작고, 우리의 수용 능력은 더 취약하며, 우리가 관심 기울이는 존재들에 보이는 애착은 더 신실하지 못합니다.........나는 식물에 고유하게 나타나는 주의 양식에 주목하려 합니다........식물은 물리적 원소를 대상이 아니고 대상화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원소에 주의를 기울입니다........식물의 존재는 공기, 습기, 토양, 온기, 햇빛과 함께-있음입니다. 식물은 원소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자기 자신이 됩니다. 식물은 현상적으로 무차별처럼 보이는 원소에서 차이와 고유성을 끌어냅니다........식물의 체화된 실존과 활력은 끊임없이(지속성인용자 붙임) 생명의 기본조건에, 무엇보다 원소에 들어 있는 생명의 기본조건에 주의를 기울입니다.(240~242)

 

생명이 취하는 형식은 살아 있는 자기들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표상하는 방식의 산물이다_에두아르도 콘. 인간을 둘러싼 태초의 세계는 숲이다. 그 숲을 인간은 어떻게 표상했을까? 어떻게 표상했기에 인간이 되었을까? 유인원과 인간을 가르는 직립보행은 우림에서 일어날 수 없다. 사바나 풍경이라야 열 수 있는 가능성이다. 우림에서 다른 동물과 공유하던 감각은 사바나에서 달라져 계층화가 진행된다. 마침내 사막에 이르러서는 감각의 퇴화가 일어난다. 퇴화를 맹렬하게 촉진한 것은 언어, 그것도 문자다. 문자는 감각을 죽이고 인식을 옹립한다. 인식은 대상화다. 모든 대상은 대문자 생명인 인식주체에게 차이와 고유성을 박탈당한다. 차이와 고유성 없는 대상에게서 인식주체는 체화된 실존과 활력의 지속적 감각을 거둬들인다.

 

자연을 아는 것은 자연을 느끼는 것의 절반만큼도 중요하지 않다_레이첼 카슨. 아는 것은 언어적 인식이다. 인식의 끝은 수탈이다. 수탈의 끝은 황폐한 허무다. 느끼는 것은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지는 감각과 이들 오감의 네트워킹이 빚어내는 제육감의 통짜 감각지각이다. 감각지각의 끝은 신실한 애착이다. 신실한 애착의 끝은 풍요로운 실재다. 풍요로운 실재를 복원하려고 인간이 숲으로 귀환할 때 숲은 어떻게 표상될까? 인간의 귀환은 어느 특정 시공간인 숲을 향한 단순 복귀가 아니다. 장구한 세월에 걸친 실패와 범죄는 물론 숭고와 각성을 모두 끌어안고 들어갈 터이므로 숲을 표상하는 방식은 종말론적 진경을 드러내는 무엇일 수밖에 없다. 숲의 종말론적 플랜데믹이 인간의 감각지각을 습격할 거라는 소문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