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의 사유 - 식물 존재에 관한 두 철학자의 대화
루스 이리가레.마이클 마더 지음, 이명호.김지은 옮김 / 알렙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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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가레: 자연은 우리가 매번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말하자면 우리가 숨 쉬고, 먹고, 감각을 통해 사유하고, 나누기 위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줍니다. 인간의 달력과 비교하면 계절의 리듬은 얼마나 풍요로운가요!

  계절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헤아릴 수 없는 다양성과 비교해보면 우리의 연간 일정은 너무 추상적이고 우중충하며 돈에 지배되는 것 같아 보입니다.(71)

 

마더: 계절의 시원에 놓여 있는 행성의 시간은 식물적 생명의 단계와 인간이 식물을 대하는 단계에 의해 측정됩니다. 씨앗을 땅에 맡기는 제 때가 있습니다. 어린 싹이 부분적으로 땅의 어둠을 벗어나 바람이 잘 통하는 드넓은 하늘을 향해 뻗어 나올 때, 혹은 꽃을 피울 때, 다른 계절이 도착합니다. 또 태양()의 빛과 열을 흡수하여 열매를 맺고 수확하는 숙성의 계절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눈에 덮여 하늘에서 내린 물로 돌아가는 휴식의 계절이 있습니다.(221~222)

 

사계절의 경험에 터해 그 풍요로움과 리듬에 맞추어 사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리가레와 마더의 말은 온대지방에 국한된 진실이다. 열대지방 사람이라면 무엇보다 마더의 눈에 눈이 동그래질 테고, 한대지방 사람이라면 무엇보다 이리가레의 풍요에 풍풍 콧방귀를 뀔 것이다. 나는 이들과 달리 계절의 리듬이 아니라 식물 생명 자체의 리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눈 내리는 계절 없는 열대지방에서도 바나나와 파파야는 각기 주기를 따라 인간과 마주한다. 풍요와는 거리가 먼 툰드라 동토에서도 선태와 지의는 각기 주기를 따라 인간과 마주한다. ‘문화적계절 감각에 기대어 식물 생명으로 다가가지 말고 단도직입 식물 생명의 생태로 다가가자. 구태여 사계절 프레임에 맞추어 식물 생명을 사단계로 파악할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우선 이런 이야기부터 들어본다.

 

스탠포드 대학교 연구진은 1년에 4번씩, 4년에 걸쳐 25~75세 캘리포니아 주민 105명의 혈액을 채취했다. 그를 토대로 면역력, 염증 정도, 심장 상태, 신진 대사, 미생물 생태계 등에 관한 분자 데이터를 분석했다. 식단과 운동 습관 역시 추적 관찰했다. 그 결과 해마다 천 개가 넘는 분자가 밀물과 썰물처럼 증감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런 변화는 대개 늦봄-초여름과 늦가을-초겨울의 두 시점에 일어났다. 늦봄에는 알레르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염증 지표가 상승했다. 류머티즘성 관절염, 골 관절염 관련 분자가 급증했으며 2형 당뇨병의 위험을 나타내는 단백질과 수면 사이클을 조절하는 유전자의 수치 역시 최고치를 기록했다. 초겨울에는 바이러스성 감염과 싸우는데 기여하는 면역 분자가 증가했다. 이런 결과를 토대로 보면 인간의 몸에는 두 계절만 존재한다.

 

계절이 둘이면 넷인 것보다 덜 역동적인가? 얼핏 보면 당연한 것 아니냐고 하겠지만 이는 방편 차원의 패턴 차이일 뿐이다. 현실로 나타나는 생명의 변화를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것이 계절이라는 언어적 구획보다 더 중요하다. 문제는 계절이 아니라 계절을 구성하는 식물 생명의 변화 과정 자체다. 바로 그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 이야기를 두 사람이 여간해선 생성하지 못한다. 난관이다. 나도 난관이다. 요즘 내가 집중 비-집중을 갈마들이며 가 닿고자 하는 경계가 거기다. 이 책과 씨름하던 중에 에두아르도 콘의 숲은 생각한다를 읽은 이유도 마찬가지다. 온갖 찬사와 무관하게 거기엔 숲의 생각이 없었다. 숲은 식물인데 온통 인간과 동물, 그리고 영 이야기뿐이다. 이들이 상호작용하는 시공간이지만 않고 더 근원적인 생성 주체인 숲 자신이 왜 누락되고 마는지.

 

어떻게 하면 식물의 생각을 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식물의 말을 들을 수 있을까? 현재 수준에서 하나의 가능성을 열어본다. 내가 식물과 마주 또는 함께하기 때문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면 그것이 그 시공에서 그 식물이 건네주는 생각이며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일이 어떤 주술적 상황에서 발생하지 않고 일상적인 인식 경로를 통해서 일어나도 결론은 같다. 예컨대 어떤 계기에 내가 아까시나무를 달리 표상함으로써 내 생명이 취하는 형식을 변화시켰다면 그 바뀐 기호가 바로 아까시나무의 생각이며 말인 것이다. 아까시나무와 절연되어 나 혼자 그 새로운 기호를 만들 수 없으므로 그것은 내 생각과 말이 아니다. 설혹 다른 사람의 생각과 언어가 매개했다고 하더라도 내가 아까시나무와 마주하지 않았다면 그 매개가 성립할 수 없으므로 결론은 같다. 일단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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