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의 사유 - 식물 존재에 관한 두 철학자의 대화
루스 이리가레.마이클 마더 지음, 이명호.김지은 옮김 / 알렙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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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생애 최초 십 년을 디딜방아로 빻은 옥수수에 산나물 넣어 밥을 해 먹는 강원도 평창 오대산 계곡의 작은 산골마을에서 자랐습니다. 원시 상태나 다름없는 삶의 자연적 조건은 제 생애를 꿰뚫고 흐르는 녹색, 그러니까 식물적 감수성을 새겨넣어주었습니다. 이끼는 물론 지천에 깔린 이름 모를 크고 작은 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풋고추, 오이, 호박....... 산을 뒤덮은 소나무, 전나무....... 천지가 온통 녹색이었으니 생명의 본질이 녹색이라 여길 수밖에 없었을 테지요.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몰라도 저는 녹색이라면 눈 감고 만져서도, 냄새만 맡아도 느낄 만큼 살가웠습니다.

 

그리고 녹색생명은 적어도 제게는, 동물보다 격조 높은 생명입니다. 녹색 생명은 세계의 진실이 비대칭적 대칭이라는 것을 동물보다 훨씬 더 잘 알고, 구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번 뿌리내린 땅에서 평생을 살아야 하므로 쌍방향 생명력을 지닐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시는 대로 한의학은 이런 녹색 생명체를 그대로 약으로 쓰니 제가 한의사가 된 것은 어쩌면 운명일 것입니다. 상담치료 또한 이런 이치를 그대로 받아들였음은 물론입니다.”

 

인문과 한의학 치료로 만나다(2014, 미래를 소유한 사람들) 6-7쪽에 실린 글이다. 루스 이리가레와 마이클 마더가 식물의 사유라는 이름의 책으로 묶일 서신을 교환하던 바로 그 무렵 나는 이 책을 쓰고 있었다. 같은 감각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 형성되는 동시성이라 하면 신비주의가 되려나. 신비주의든 아니든 분명한 것은 겹치는 시기에 루스 이리가레와 마이클 마더처럼 나 또한 지극한 식물 생명감각으로 내 의학과 인문사상을 숙고하고 구성했다는 사실이다. 서로를 이어주는 정신 네트워크가 실재한다는 말에 품었던 의심과 신뢰의 경계선이 아연 뭉개진다.

 

육식을 거의 하지 않아서 초식동물이라는 별명을 지닌 정도일 뿐 스스로 식물성인간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다가 뚜렷하게 자각한 것은 40이 넘은 어느 시점이었다. 한의대에 가려고 경기도 용인에 있는 작은 절에서 공부할 때였다. 숲속을 걷는 게 중요한 일과 중 하나였는데 늘 동행하던 처사 한 분과 내가 확연히 다른 점을 알게 되었다. 그는 동물에만 관심을 가지는데 나는 식물에만 관심을 보였다. 어느 순간 그가 말했다. “강 선생은 식물성인간이군. 물론 나는 동물성인간이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지나온 내 삶 모두가 한 두름에 꿰어지는 느낌이 왈칵 들이닥쳤다. 덧붙일 어떤 말도 필요 없이 나는 내가 식물성인간이며 그 의미가 무엇들로 구성되는지를 단박에 알아차렸다.

 

한의사가 되어 진료소를 냈다. 개원 풍경이 어디나 그렇듯 난초를 포함한 여러 개의 화분이 선물로 들어왔다. 그 식물들이 대부분 1년 안에 죽는다는 사실을 누구도 모르지 않는다. 나도 처음엔 무심코 습관으로 물을 주었다. 그런데 2-3년이 지나도 그들 모두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먼저 놀란 것은 간호사였다. 나는 한 동안 잊고 지냈던 진실과 재회했다. “, 내가 식물성인간이라 얘들이 곁에서 오래 살 수 있구나!” 그 뒤부터 나는 단 한 번도 무심코 물을 준 적이 없다. 쓰다듬고, 가볍게 건드리고, 말도 건넸다. 5년 정도 지나면서부터는 하나 둘씩 죽었는데 10년 째 곁을 지키는 난초가 있다. 내가 늙어가면서 그랬듯 난초도 키가 작아졌지만 녹색만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식물성인간으로서 식물성 공부를 하고 식물성 치료를 하고 식물성 글쓰기를 한다. 식물성 나들이 어느 길목에서 루스 이리가레와 마이클 마더가 쓴 식물의 사유소식을 듣는다. 관심과 기대가 남달랐다. 나는 임상가라서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데 더 관심이 가고 더 기대를 품는다. 이 책이 내 관심에 부응하고 기대를 충족시켰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저자들이 식물을 경유해through vegetal being 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만 동아시아 임상가인 내게는 그다지 새롭지 않다. 그들이 철학자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임상가의 관심과 기대가 앞서가거나 어긋난 측면도 있으니 저자들을 탓할 일은 아니다. 저자들의 생각을 발맘발맘 따라가면서 내 관심과 기대를 스스로 톺아보면 예상 밖의 무엇과 조우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일단 길을 나서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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