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란 무엇인가 - 농담과 유머의 사회심리학
테리 이글턴 지음, 손성화 옮김 / 문학사상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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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 유머와 유토피아 유머를 결합한 방식이 존재한다. 카니발이다.(236쪽)


카니발 담론은 양날의 칼이다. 변형된 자유, 유대, 평등 세계를 추구하기는 하지만, 그 세계를 달성하기 위해서 조롱하고, 풍자하고, 망가뜨린다. 따라서 카니발의 비판적 기능과 긍정의 기능은 한 몸이 된다.(237쪽)


미하일 바흐친에 따라 카니발이 지니는 비대칭의 대칭을 한참 전개하다가 어느 순간, 테리 이글턴은 정색하고 멈춰 선다. “바흐친의 과도한 찬가에서 어떤 이상화의 낌새를 감지”(244쪽)하고, 점검에 나선다.


가장 먼저 그가 제기한 문제는 “카니발은 어쩐지 비극을 추방해버린 세계처럼 보인다.”(244쪽)는 것이다. 유토피아 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지적이다. 자연스럽게 “픽션화된 형태의 반란일 수는 있으나, 그처럼 체제전복적인 에너지의 안전판 역할을 하기도 한다는 점”(245쪽)으로 이어간다. 동의한다.


찰스 아이젠스타인의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리뷰 <28. 문명의 위기와 재난공동체>(2018. 7. 16)에서 인용한 이문재 시인의 <대재난을 응시하라>(2013.10.9. 경향신문) 일부를 다시 읽어본다.


“지구의 전부, 문명의 전 과정이 올라오는 식탁에서 인류의 미래를 염려하다가 ‘지푸라기’ 하나를 발견했다. 레베카 솔닛의 탐사보고서 <이 폐허를 응시하라>. 솔닛은 대지진, 대공습, 테러 등 재난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우애와 환대의 공동체를 만들어내는지를 입체적으로 관찰한다. 소수 권력자나 대중매체는 재난 속에서 인간은 야만으로 돌변한다고 강변하지만, 정작 시민들은 지옥 속에서 ‘꽃’을 피워낸다. 이타주의, 연대, 즉흥성, 창의성이 어우러진 자율적 공동체를 조직한다는 것이다. 솔닛은 “재난은 지옥을 통과해 도달하는 낙원”이라고 말한다.·······


솔닛의 ‘지옥 속의 유토피아’는 그것이 예고 없이 형성되고, 또 지속적이지 못하다는 단점을 갖고 있다. 솔닛은 멕시코 남동부 산악지대에서 재난 공동체의 영구화 시도를 발견한다. 멕시코 오지 사파티스타 마을 입구에는 이런 푯말이 붙어 있다. “이곳에서는 민중이 통치하고, 정부가 복종한다.” 대재앙이 우리 앞에 있다. 자연재해를 막을 수는 없다. 100% 안전한 원전도 보장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지속가능한 재난 공동체가 ‘마지막 비상구’ 중 하나일 것이다. 지옥에서 인간 본성을 다시 만나고, 국가의 맨얼굴과도 마주치게 될 것이다.”


만일 시인이 2014년 4월 16일 이후 우리사회에 일어났던 일련의 일들을 겪고 나서 요즘에 썼다면 어땠을까. 416학살과 그 재난으로 태어난 공동체, 박근혜 파면을 이끌어낸 촛불혁명, 2016년 총선에서 시작되어 마침내 2020년 총선이 분명히 드러낸 이탈과 전향의 징후, 이 과정을 꿰뚫는 518공동체의 필연적·지속적 물질 아우라를 포착하지 않았을까.


이 물질 아우라는 카니발리즘이 휘감은 카니발에서 나올 수 없다. 이것은 리미널리티(빅터 터너)가 불붙인 커뮤니타스(빅터 터너)에서 나온다. 커뮤니타스는 비극을 추방하지 않는다. 물론, 비극을 추종하지도 않는다. 비극을 삶의 한복판에서 끌어안고 그 지옥을 가로지르며 욼음으로 유토피아를 일궈낸다. 우스개와 우르개가 비대칭의 대칭성을 펼쳐가는 이 우아·숭고야말로 장엄을 전미래적으로 선취하는 한맛이다. 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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