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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센트 카드를 지니고 다닌 적이 있었다. 식사 중에 음식 국물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옅은 초록색 얼룩이 지고 말았다. 젊은날 소향대로라면 섬세하게 얼룩을 지웠을 것이다. 나는 다른 선택을 했다. 얼룩을 나뭇잎 그림으로 바꾸고 나뭇가지를 더 그려 모양을 잡았다. 비오는 날 다른 얼룩이 생겼을 때도 같은 유의 작업을 했다. 그림이 또 달라졌다. 우울증으로 상담하러 온 분이 얼핏 보더니 본디 있었던 그림인가 물었다. 내가 곡절을 말해주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 작은 마주침을 기회로 삼았다.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입니다. 있는 것은 있는 것입니다. 억지로 지우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 곡진한 터전 위에 새로운 삶을 지어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우울증 치유도 이런 인생 이치 안에 있습니다.” 그는 눈을 감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담 치유 절반은 끝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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