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 - 세월호의 시간을 건너는 가족들의 육성기록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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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전환이 됐죠. 그게 또 맞는 일 같고요. 거의 50년 동안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어요. 우리 가족이 평안하고 잘되면 ‘다 괜찮구나.’ 생각하고 살았던 거죠. 참사 나고 ‘아, 내가 너무 잘못 살고 있었구나.’ 깨달았어요. 전에는 불쌍한 사람 보면 ‘불쌍해서 어떡해.’ ‘밥이라도 사 드세요.’ 밥값을 주는 정도로 생각했다면 지금은 그분들이 왜 그렇게 불쌍하게 됐는지를 고민하게 돼요. 전에는 보여주기 식으로 할 수 있는 만큼 조금씩 했다면, 지금은 더 구체적으로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은 거죠. 세상을 바라보는 생각, 시선이 많이 바뀌었어요.(338~339쪽-시찬 아빠 박요섭)


구체적으로·······들여다보고” “왜 그렇게·······됐는지를 고민”하는 것에는 사전적 의미만으로 포착할 수 없는 맥락 함의가 존재한다. 여기서는 개인 너머 구조를 보는 사회학적 상상력과 경험 또는 지각이 가능한 물적 사유의 결합을 말하고 있다. 구도족속이나 책상물림이 가 닿을 수 없는 오도나 실천의 경지에 이른 완전 전환이다.


이 완전 전환은 결곡한 앎의 땅에서 곡진한 삶의 싹이 움튼다는 진리를 일깨운다. 아니다. 곡진한 삶의 눈물에서 결곡한 앎의 웃음이 피어난다는 진리를 일깨운다. 시찬 아빠 박요섭은 사유화된 국가가 시찬이를 살해한 현실 삶을 곡진히 꿰뚫어 앎의 결곡함으로 나아간 것이다. 다름 아닌 통오痛悟다. 통오는 공동체윤리를 구성한다.


공동체윤리는 타자의 고통에 참여하는 자발성을 축으로 삼는다. 타자의 삶에 참여하는 일은 겸허를 바탕으로 한다. 타자의 진실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모를 때 관념이나 추상이 유혹한다. 그 유혹의 덜미를 낚아채는 것이 경험 또는 지각이 가능한 물적 사유다. 물적 사유의 모태가 바로 아픔이며 슬픔이다. 신음이며 눈물이다. 절규다.


절규는 지극히 구체적이다. 구체적 절규 시찬이는 박요섭에게 구체적 천하무인天下無人의 깨침을 선물해주었다. 시찬이가 무수한 시찬이로 부활할 때, 타자가 타인이 아니게 될 때 진정한 공동체가 탄생한다. 진정한 공동체를 꿈꾸는 내게는 과연 무엇이 절규일까. 엄마다. 텅 빈 엄마가 그리움과 기다림으로 가득 찰 때 나도 공동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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