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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 - 세월호의 시간을 건너는 가족들의 육성기록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평점 :
미수습자 은화 사진 들고 ‘세월호 인양하라’ 피켓 들고 서 있었거든요. 지나가던 사람이 자기는 의료사고로 아이를 잃었는데, 시끄러운 거 싫어서 참고 산다고 하는 거예요. 그 당시에 아무 말도 못하고, 울지 않으려고 턱이 아플 정도로 참고 있었어요. 그 다음날 가족증명서를 떼다 벽에다 딱 붙였어요. 준영이 사망신고를 안 했거든요. 진실을 알기 전에는 안 보낸다. 아직 내 가슴에 묻을 수 없다. 그때는 그런 걸로 버텼어요. 집 이곳저곳에 노란리본 다 붙이고, “난 세월호 엄마야, 세월호 엄마야” 나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면서 풀고 살았어요.(296쪽-오준영 엄마 임영애)
“시끄러운 거 싫어서 참고 산다”는 말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 맞으면서도 참고 사는 엄마 입에서 나옴직한 얘기다. 참 평화가 아님은 둘째 치고 그 과정에서 자신과 자녀들이 시시각각 죽어간다는 사실을 은폐함으로써, 참고 사는 것은 참담한 살인방조가 된다. 시끄러운 거 싫어서 죽음의 진실을 묻어둔 채 체념애도를 선택함으로써 자기 아이 다시 죽이는 엄마의 길을 어찌 남에게 요구하는가.
더 참람한 것은 세월호‘사건’이 의료‘사고’와 같다고 여기는 무지다. 그 무지는 개인 탓이 아니다. 불의한 국가권력과 사이비 언론의 속임수에서 비롯했다. 하지만 속임수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자기 아이 죽음을 가볍게 생각하듯 세상일을 어정뜨게 대하는 태도에 있다. 1시간 동안 12번이나 단원고 아이들만 콕 찍어 ‘가만있으라.’ 명령하고 구조하지 않은 것이 어떻게 의료사고와 같은가.
416가족은 물론 시민도 416의 정치적 고의성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안전사고나 노동 탄압도 넓은 의미에서 불의한 지배층이 피지배층 약자를 함부로 대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기는 마찬가지지만 사회적 사건이다. 416은 단도직입으로 국가권력이 정치적 목적으로 조직 또는 개입한 학살사건이다. 아이들의 입장으로 보면 이는 분명히 “항쟁”이다. 총 들 수 없었을 뿐 518이 왜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