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 - 세월호의 시간을 건너는 가족들의 육성기록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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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영석이 엄마와 나, 둘만의 시간이 되었잖아요. 집에 가면 완전히 각자예요, 각자. 영석이 엄마는 거실, 나는 침대.

·······

  독거노인들이 아무도 모르게 쓸쓸히 죽음을 맞는 이야기를 TV에서 봤어요. 몇 달 만에 부패된 모습으로 발견되는 일요. 혹시 우리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참 염려스러워요. 둘 중에 먼저 죽은 사람은 남은 한 사람이 챙겨주겠죠. 태워서 뿌려주기라도 하겠죠. 그런데 마지막에 죽는 사람은 누가 찾아오지 않으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지 않을까...(279~280쪽-영석 아빠 오병환)


터어키 소재 괴베클리 테페에서 늦어도 기원전 9600년에서 이르면 15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하고 정교한 석조유적들이 발견되어 충격을 던져준 바 있다. 특히 그 용도를 놓고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신전설이 유력하다고 한다. 나는 장례의식을 치르던 곳이라고 생각한다. 종교와 장례의 역사적 선후를 구태여 따진다면 후자가 먼저다. 우치다 타츠루는 장례의식으로써 인간은 영장류에서 벗어났다고 말한다. 귀담아 들을만하다.


우치다 타츠루에 따르면 장례는 죽은 사람을 떠나보내는 마감의식이 아니다. 오히려 삶과 죽음의 경계 시공을 유지함으로써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의식이다. 현대인, 특히 조문자의 입장에서 보면 장례는 산 자와 유지하는 관계 때문에 참석하는 거의 무의미한 ‘행사’에 지나지 않는다. 얄팍하고 일방적인 현대문명의 원인이자 결과이리라. 현대문명의 위기가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는 이때 “장례”적 문명비판의 실재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현대문명은 대놓고 죽이고 함부로 애도한 뒤 좀비처럼 사는 인간을 ‘대박 났다’고 한다. 영석이도 영석 아빠 오병환도 영석 엄마도 이 프레임에 희생당한 것이다. 물론 대놓고 죽이지 않는 것이 근본 원리다. 물론 좀비로 살지 않는 것이 물적 실천이다. 그 둘을 이으려면 번역이 필요하다. 번역은 장례의 시공에서 이루어진다. 장례의 시공에서 산 자가 죽은 자를 “정확하고 정당하게” 예우함으로써 세계는 ‘안팎을 지닌 하나’(장회익)가 된다.


안팎을 지닌 하나로서 세계를 복원하려 할 때, 영석 아빠 오병환이 걱정하는 장례의 형해 또는 거세가 가장 현실적인 해결 과제다. 죽음을 떠드는 철학이 아니라, 죽은 자에 가 닿는 장례야말로 살생 자체인 이 시대의 웅숭깊은 태스크 포스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영석 아빠 오병환은 개인의 걱정 너머 장례의 실재로 나아가고 있다. 내 416의학은 그 뒤를 좇아, 알 수 없으나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끝나지 않은 웅얼거림을 계속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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