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 - 세월호의 시간을 건너는 가족들의 육성기록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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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척들은 이 사건을 그야말로 ‘사고’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놀랄 만한 기사들을 문자로 보내줬거든요. 예진이가 사고로 간 게 아니다, 난 이렇게 살고 있다, 그런 의미로 보냈는데 반응이 없어요.(266쪽-정예진 엄마 박유신)


지난 7월 15일 이 리뷰 <29. 철학부재사회>에서 ‘천안함’은 사건으로, ‘세월호’는 사고로 명명한 어느 저명한 철학자 얘기를 하면서 우리사회가 삼류임을 지적한 바 있다. 삼류사회는 당연히 삼류가 지배하고, 이류는 마름 노릇하고, 일류는 익명으로 존재한다. 익명 존재인 일류에는 두 부류가 있다. 스스로 알고 인욕忍辱 또는 진進욕하는 주체-일류. 삼류가 수탈하고 학살함으로써 명명되는 객체-일류. 객체-일류는 학살자의 폭력과 협잡으로 끊임없이 남김없이 “사고 처리” 당한다.


416아이들의 사고 처리는 ‘놀러가다 교통사고 났는데 빠져나오지 못한 철없는’ 것들로 오명을 뒤집어씌워 사회역사의 공적 지평에서 치워버리는 것이다. 정권유지 (또는 그 밖의 다른) 목적으로 살해했다면 416아이들은 사적 파렴치범죄의 단순 피해자가 아니다. 바닷물 속에서 맨주먹으로 싸운 ‘전사’다. 끝내 돌아오지 못한 ‘전사자’다. 영웅 만들기 위한 신화화라고 말할 것인가. 416을 향한 박근혜 패거리서껀 매판지배층의 그악한 ‘총질’과 대비시켜 보면 아이들을 전사요 전사자라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분명히 하자. “예진이가 사고로 간 게 아니다,” 정예진의 죽음이 지니는 의미를 사회역사의 공적 지평에서 복원시켜야 한다. 정확하고 정당한 애도의 예를 갖추어야 한다. 그렇게 정예진을 복권시켜야 한다. 정예진의 복권 없이 일류사회로 가는 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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