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 - 세월호의 시간을 건너는 가족들의 육성기록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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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살아야 되니까 사는 것 같아요.(240쪽-진윤희 엄마 김순길)


‘그냥’이란 말이 없다면 ‘살아야 되니까’는 특별한 목적이나 비상한 사명을 내포한다. 문맥을 고려해 적절하게 고친다면 이 문장은 이렇게 될 것이다.


“그냥... 살아지니까 사는 것 같아요.”


인습이 인간을 얄팍한 싸구려로 만든다. 인습이 우리에게 주입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 ‘삶의 의미’ 따위다. 인간은 정녕 존엄한가? 삶은 실히 의미 있는가? 딱 한걸음만 물러나 생각해봐도 실재 세계에는 옹골찬 그 근거가 없음을 알 게 된다. 이 호들갑스럽고 각 잡힌 표현은 지나치게 팽창한 인간의 자아의식이 빚어낸 종적 편향을 드러낸다.


종적 편향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이 표현이 실제로는 비참한 인간, 무의미한 삶의 경험이 가져다준 공포·불안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낸 부정 개념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이 금과옥조로 지니고 있는 수많은 개념들에는 이런 전복적 진실이 숨어 있다.


전복을 통해 인간이 깨닫고 깨쳐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언어의 배신은 궁극적으로 인간성의 배신이다. 인간성의 배신은 제도로 세탁되고 문명으로 윤색된 악이다. 악을 직시하여 깨닫고 깨치면 인간의 존엄과 삶의 의미는 전제되고 선언되는 당위가 아니라 싸워서 확보하고 찾아서 채워야 하는 현실임을 증명할 수 있다.


싸우면 존엄이 확보되는가? 찾으면 의미가 채워지는가? 그러므로 살아야 하는가? 아니다. 전복은 다시 전복된다. 확보는 찰나에 부서진다. 채움은 찰나에 무너진다. 세우면 무너지고 무너지면 세우는 경계에서 그냥 살아지는 것이 인간이며 삶이다. 실체와 허무의 마주 가장자리에서 다함과 비움의 맞물림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인간이다. 인간의 존엄과 삶의 의미는 점멸하는 진리다. 점멸하는 진리로써 나날이 겸허에 이르는 416엄마는 오늘도 나지막이 고백한다.


그냥... 살아야 되니까 사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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