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 - 세월호의 시간을 건너는 가족들의 육성기록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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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사가 나서 가정이 다 무너졌어요. 정말로 생각하지 않은 길로 가고 있어. 우리 반만 해도 세 가정이 이혼했어요. 우리도 몇 번 심각하게 싸웠어요.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이 있잖아요. 예전에는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참사 나고서는 싸움이 격해져요. 정말로 심해져요.·······이런 게 트라우마 아닌가?·······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거는 뭐 평생을 안고 가야지. 고칠 수가 없잖아요? 애가 살아온다면 고쳐지겠지만 애는 안 돌아오는데... 싸우기도 참 힘들어요. 죽을 때까지 이렇게 싸워야 하는 건지, 아니면 너 원하는 데로 가라고 해야 할지, 그것도 모르겠어요.(236~237쪽-미지 아빠 유해종)


언어가 그렇듯 인간 행위는 언제나 모자라거나 넘친다. 박근혜가 416을 일으키고도 결국 파면되어 감옥에 간 것을 보면 그 학살은 모자란 것이었다. 17살짜리 아이 하나를 죽였는데 부모가 이혼하고 가정이 무너진 것을 보면 그 학살은 넘치는 것이었다. 모자란 경우는 분해서 가슴 칠 테지만 넘치는 경우는 오직 모를 뿐이다. 이런 이치로 악인은 자신의 악행보다 더 멀리 나아가는 악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알아차리지 못하므로 악을 성찰하지 않는다. 성찰되지 않는 악은 강고해진다. 강고해진 악은 제도로 세탁되고 문명으로 윤색된다.


박근혜만 알지 못한 게 아니다. 사실 당사자가 아니므로 나 또한 그렇게나 많은 부모들이 격심하게 싸우고 이혼을 고민하고 끝내 이혼하는지 알지 못했다.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니라 가해자가 분명히 있는 살해사건으로 아이를 잃은 부모라면 결속이 강화될 것 아닌가, 하겠지만 바로 이게 섣부른 생각이다. 당최 이것은 싸움이 아니었다. 일방적 폭력이었다. 옹골찬 전의 이전에 깊은 상처가 존재한다. 깊은 상처를 지닌 사람이 스스로 또는 서로 치유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더군다나 416부모에게서 이런 일을 예상 심지어 기대하는 것은 그 자체로 2차 가해다. 오죽했으면 생때같은 새끼 묻고 돌아서 싸우고 싸우다 갈라서겠나.


악이 스며드는 섬세하고 유장한 결을 감지하는 과정에서  ‘악’을 써야만 가능한 경우가 수없이 있을 것이다. 악행으로 악을 일으키는 자들은 이  ‘악’쓰는 행위를 쌍스럽게 여기도록 유혹한다. 악 아닌 선이 실재라고 기품 있게 훈계한다. 선에 주의하고 악에서 눈을 떼라고 권면한다. 결국 인간의 선은 둔하고 뭉툭한 원리로 머문다. 스스로 선의 편에 서 있다고 자부하는 결벽증은 아둔하고 멍청한 근본주의로 시시각각 낙하한다. 근본주의가 이미 임계점에 도달한 우리사회가 던지는 군박한 화두는 오직 이것이다: 악을 공부하는  ‘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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