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 - 세월호의 시간을 건너는 가족들의 육성기록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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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옥도 그런 지옥이 없었어. 울고불고 소리 지르다 기절하고 아비규환이었지. 밤에라도 애들이 나오면 신상, 특징, 이런 게 TV로 나와. 그러니 다 멍하게 앉아서 TV만 쳐다보는 거야. 우리 애가 나올까? 생각하면서. 

  처음에는 안 나오길 바랐지. 나온 애들은 이미 죽은 애들이니까. 안 나오면 살아 있을 확률이 있는 거잖아. 그런데 사흘이 지나가니까 나왔으면 좋겠다.......난 윤민이가 고통 받는 게 싫더라고.·······엄마란 사람이.......(92쪽 최윤민 엄마 박혜영)

우치다 타츠루는 『소통하는 신체』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게는 망자의 소리가 들린다”는 사람과 “들리지 않는다”는 사람이 있다면 들린다고 주장하는 쪽이 정치적으로 강한 힘을 갖기 마련입니다.

416 직후 온갖 거짓말과 조작으로 사건을 은폐·왜곡하던 박근혜 패거리 가운데 어떤 자가 공식석상에서 “내가 (부모보다) 더 가슴 아프다”고 지껄인 적이 있다. 우치다 타츠루가 이 장면을 보고 나서 한 말은 아닐 테지만, 아무튼 정확해서 뼈아픈 지적이다.

어찌 살아 있기를 바라지 않았으랴마는 사흘이란 참혹한 시간이 최윤민의 고통을 몸 느낌으로 전해주자 엄마 박혜영은 홀연히 생사 구분을 놓는다. “엄마란 사람이.......”는 “엄마란 그런 사람이니까.......”를 품고 있으나 정치적 강자의 가증스런 흰소리를 꾸짖기 위해 대칭의 한 축을 침묵 속에 넣어둔 것이다. 하여 더는 입을 열 수 없는 자리에 스스로 앉는다. 

정치적 강자는 엄마의 이런 자기모멸을 또 다시 조롱한다. 이날 입때껏 정치적 이용을 비난하는 정치적 이용 놀이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있다. 죽임으로써 생명을 모독하고, 죽음을 따라다니며 끝내 모독하고, 죽음의 애도마저 기어이 모독하고야 마는 극한의 파렴치에 절어 있다. 이런 정치적 강자에 사실상 속수무책인 우리사회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다시 416을 일으킬 것이다. 실로 송연한 전망이다.

송연한 전망을 송두리째 전복하려면 최윤민의 죽음을 함부로 서둘러 규정하고 애도하면 안 된다. 진실의 뼈대랍시고 박근혜 패거리 고의범죄 사실을 밝혀 심판하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 그 또한 매판 본진이 바라는 바다. 더 끈덕지게 더 웅숭깊게 최윤민의 죽음을 끌어안고 귀 기울이며 살아내야 한다.

죽은 사람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산 사람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뿐이다.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한다. 그 보이지 않는 존재가 우리의 윤리를 구성하며 창조를 추동한다. 죽은 최윤민이 산 우리의 진리지향이며 숭고도정이다.

우리 지향의 향 맑은 소식을 듣고 도정의 정갈한 기운을 받는 길은 뭔가. 어려워서 쉽다. 하나, 나지막이. 둘, 멀찌막이. 셋, 느지막이. 산 사람이 죽은 사람과 영원한 동지가 되는 방법이다. 매력적이지 않아서 매혹적인 삶의 전언이다. 공감하기 쉽지 않으리라. 높은 것이, 내 눈 앞에 바로 펼쳐지길 바라는 것이, 우리 삶의 기조니까. 기조를 엎어야 혁명이다. 혁명은 결국 죽은 사람을 부여안고 차마 들을 수 없는 그의 말을 들으며 그와 함께 죽임의 벽을 뚫는 바보짓이다.

바보 좇아 나의 유월이 발맘발맘 걸어가고 있다. 나는 잊을 수 없는, 또 잊어서는 안 되는 사람과 진리 때문에 그마저도 두 달을 덜어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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