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 - 세월호의 시간을 건너는 가족들의 육성기록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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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12월 21일 밤 11시쯤 막내한테서 누나가 이상하다고 전화가 왔어요.·······소희가 먹던 약이 있었는데 그걸 한꺼번에 다 먹고 손목을 세 번인가 그었어요.·······

  그날 밤 아이를 병원에 두고 집에 왔는데, 베개 밑에 소희가 써둔 편지가 있었어요.·······친구가 너무 그리워 가겠다, 그런 내용이었죠. 그냥 멍하고, 아무 생각도 안 들고, 다 싫은 거예요. 뭐 하러 사나, 그런 생각이 드니까 주체가 안 되더라고요. 그날 나도 죽으려고 했어요. 칼로 그었는데, 아직도 흉터가 있어요.(85쪽)


  트라우마는 몸속에 내재해 있다가 힘들 때 나오는 거라고 하던데 앞으로도 걱정이에요. 한번이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쉽다던데. 나는 아마 죽을 때 눈 못 감고 죽을 거예요. 유가족 분들이 나를 보고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우리는 가슴에 묻으면 되는데 당신이 걱정이다.”

  소희 소식 듣고 제일 먼저 달려온 것도 보미 엄마였어요.(86쪽-생존학생 소희 아빠 박윤수)


구약성서 사무엘하 12장에 다윗왕의 유명한 일화가 나온다. 어린 아들이 병들자 단식하며 엎드려 눈물로 기도한다.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내 일어나 몸 씻고 기름 바르고 옷 갈아입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맛있게 먹는다. 민망해하는 신하들에게 그가 말한다. “나는 아이에게 갈 수 있지만 아이는 내게 올 수 없다.”


‘산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죽지만 죽은 사람은 어떻게 해도 살아 돌아올 수 없다.’는 당연한 말이 무슨 중뿔난 진리를 담고 있다고 성서라며 기록해 놓았을까. ‘그러니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통속한 이야기를 다윗의 신앙이니 현실주의니 하며 추켜세울까.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올 수 없는 것은 이제 여기의 실재다. 산 사람이 죽는 것은 언제라도 가능하지만 살아 있는 이제 여기의 실재는 아니다. 마음 같아서는 아이 대신 내가 죽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이 이제 여기의 실재다. 이 간극에 전복의 진실이 숨어 있다. 내가 아이에게 갈 수 없으니 아이의 죽음을 내게 데려오는 길을 모색한다.


가슴에 묻으면” 열린다!


가슴에 묻는 것은 아이의 죽음을 내 삶의 한복판에 놓는 것이다. 내 삶의 한복판에 놓인 아이의 죽음은 내 생명의 소중한 일부로 시시각각 작동한다. 부활이 이 아니고 어찌 다른 무엇이랴. 부활로써 일치된 보미와 보미 엄마의 생명에게는 소희 아빠 박윤수가 “걱정이다.


소희의 살아 있음을, 살아 있는 그 슬픔을, 죽음에 스스로 이르고자 해도 이를 수 없는 그 참혹한 몸부림을 어찌 차마 가슴에 묻으랴. ‘죽지 못해 살아서 퍼들거리는’ 생때같은 새끼를 어찌 차마 가슴에 묻으랴. “한번이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쉽다던데.” 언제 어느 때 들이닥칠지 모르는 그 두려운 순간을 외면할 수 없기에 한사코 두 눈 부릅떠야 한다. 생사의 경계, 그 생지옥의 칼날 위에 서서 기어이 견뎌야 한다.


칼날 위에 서서 두 생명을 함께 보듬어야 하는 소희 아빠 박윤수에게 나는 무엇일까. 내가 과연 한 자락 걱정이나마 보탤 수 있는 존재일까.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매순간 무에서 창조된다. 비로소 배어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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