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 - 세월호의 시간을 건너는 가족들의 육성기록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집안에 침묵이 흘러요.·······가족이 함께 밥 먹고 아이와 이야기하는 시간도 없어졌고요. 승묵이 빈자리도 컸지만 웃고 떠들던 생활이 사라졌다는 것도 너무 힘들었어요.·······


  서로 실랑이를 벌이고, 다투고, 할퀴고, 토라지던 생활 자체가 없어졌어요.·······평범한 가정이라는 게, 기분이 안 좋으면 토라지고 의견이 안 맞으면 싸우고, 그러다가·······화해하는 그런 거잖아요. 그런 생활 자체가 없어졌어요.(83쪽-강승묵 엄마 은인숙)


사는 것은 서로 닿는 것이다. 서로 닿으면 주고받아 섞여진다. 친구도 부부도 가족도 사회도 세계도 섞이지 않는 순물질의 병존으로 이룩될 수는 없다. 서로 불순물이 되면서 서로 달라져 가는 것이 삶 자체고 의미다. 가족은 그 상호창조의 지성소다.


상처가 될까봐 끝내 서로에게 가닿지 못한다면 가족이 아니다. 사랑으로 배려로 시작한 거리두기라도 마침내 가족을 파괴하고 만다. 악이 노린 것은 강승묵 하나의 목숨이 아니라 바로 가족의 해체다. 가족 해체는 궁극적으로 공동체 해체를 향해 간다. 공동체를 해체하여 피지배자 전체를 개인의 집합으로 만드는 것이 신자유주의에 빙의된 매판 패거리가 벌여온 천년왕국 토건이다. 저들만의 천년왕국은 국가화의 절정이다. 국가화의 절정은 국가의 사유화다. 매판과두의 사유물인 국가를 거절한 참된 공동체 네트워크가 416이 제시한 길이다.


416 이후, 나는 이 사건의 사회정치적 본질에 집중한 나머지 내 개인과 가정에 던지는 인문학적 질문과 결합시키지 못한 채, 공적 참여 문제에만 몰두해온 것이 사실이다. 강승묵 엄마 은인숙이 “평범한 가정”의 붕괴가 어떻게 소미한 일상이 사라지는 데서 오는지 일깨움으로써 나는 화들짝 놀라 일어난다. 부끄러워서 자랑스러운 일이다.


나는 생애 최초 시기부터 어머니와 닿아 섞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어머니하고 이혼한 아버지가 계모와 이복동생으로 꾸린 가정에 아홉 살 무렵 내가 덧붙여졌을 때, 그 가족은 기저부터 냉랭했다. 이후 아버지와 다른 계모들이 번갈아 구성한 가족에는 평범한 가정 “생활”의 핵심이 누락되어 있었다. 어린 내 처지에서 보면 닿고 섞는 삶을 빼앗긴 시간이었다. 나는 지금도 닿고 섞는 것이 낯설고 서투르다. 이 상실과 그 영향을 선명하게 문제 삼고, 구체적인 해결책을 찾아 실천하는 것이 노년에 접어들었음에도 내게는 여전한 과제다. 이 과제는 416의 부름과 영판 다르면서 영락없이 같다.


강승묵 엄마 은인숙의 가정에서 일상생활이 사라진 것은 강승묵의 상실 그 자체의 문제임과 동시에 그에 대한 반응의 문제다. 승묵이의 상실을 확인하는 게 아프기 때문이든, 승묵이한테 미안하기 때문이든, 부질없는 일이라 느끼기 때문이든, 남은 사람들이 서로 배려하기 때문이든·······상호 합의로 이런 결과를 낳은 게 아니다. 각자 그렇게 하고 각자 고립되는 것이다. 내 경우, 그 각자가 나 한 사람이었다는 것만 다를 뿐이다.


남은 질문은 하나다. “생활을 복원해야 하는가?” 답도 물론 하나다. “그렇다.” 416이 제시한 공동체 네트워크는 거대한 무엇이 아니다. 은인숙의 가족에서 시작하는 작은 공동체가 엮이고 또 엮이는 작용일 뿐이다. 416으로 말미암아 각성한 강용원의 가족에서 시작하는 작은 공동체도 여기에 합류한다. 매판독재 정권과 가부장 권력의 본질이 다르지 않다면 은인숙이 빼앗긴 아들과 강용원이 빼앗긴 엄마 또한 다르지 않다. 누가 어떻게 왜 빼앗았는지 진실을 규명하는 것 자체가 모든 수탈을 배상하는 마법이 아니다. 돌이킬 수 없는 상실에 터하여 남은 사람들이 살아내야 할 몫은 다른 문제다. 아들과 엄마가 없음에도 "웃고 떠들던" 삶을 복원해야 한다가 아니다. 없으므로 하고 싶다, 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