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 - 세월호의 시간을 건너는 가족들의 육성기록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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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는 만큼은 노력했다고 생각해요. 엄마 따라서 집회에도 나가고, 일상생활하고, 최대한 조율할 수 있을 만큼 했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문제인 거예요.

  조율했다는 것.

  이런 일을 겪고도 일상생활과 조율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나한테는 슬픔보다 죄책감이 더 힘든 감정이었던 것 같아요.(54쪽-영만 형 이영수)


죄책감”은 인간 정신을 살천스럽게 갉아먹는다. 흔히 인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독을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살포한다. 죄의 규정, 죄지음, 죄지음의 관념, 스스로의 정죄, 정죄의 괴로움, 스스로의 형벌, 형벌의 고통, 용서의 갈구와 절망.......여기에 종교, 특히 사하라시아 종교, 그중 기독교가 개입하면 형언할 수조차 없는 맹렬함으로 인간 정신을 파괴한다. 원죄, 심판, 속죄, 구원, 최후심판.......죄책감은 실로 인간 정신의 판옵티콘panopticon이다.


여기서 말하는 죄책감은 실제로 죄짓고 당연히 느끼는, 느껴야 하는 책임감이 아니다. 인간에게 존재론적 조건으로 전제된 죄책감이다. 거대유일신을 만든 지배집단이 피지배집단에게 주입한 자기부정의 기본적 도구 가운데 하나다. 신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인 것이다.


불안에 절은 개신교 목사가 찾아왔다. 그는 원죄에 터한 신앙 논리가 필연적으로 몰고 오는 인과론적 도덕률에 묶여 있었다. 죄책감은 완벽주의로 그를 휘감았다. 완벽주의는 불안을 지속적으로 생산해냈다. 화학합성약물에 의존해 증상을 완화하거나 일에 몰두함으로써 피해나가기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통속한 개신교 교리와 어긋나는 몇 가지 이야기를 해주며 당부했다.


“신학적으로 동의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병 치유 문제를 신학으로 해결하려 드는 것은 성숙한 신앙이 아니다. 의학적 진단과 처방에 말간 마음으로 직면하라.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고통에 대한 평가를 멈추는 것이다. 기독교인이 흔히 간과하고 넘어가지만, 고통에 하느님 뜻이 있다고 하는 생각 역시 긍정주의다. 연단이라 하든 징벌이라 하든, 그런 의미 부여는 고통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지 못하게 한다. 불안의 근원인 분리와, 그 분리를 왜곡하는 죄책감을 직접 대면해서 스스로 해방해야 한다.”


종교만 죄책감을 주입하는 게 아니다. 권력이 채운 죄책감의 차꼬 때문에 고통 받은 영만 형 이영수는 아마도 평생 그 여적을 지울 수 없을는지도 모른다.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그 장면을 지켜보게 하고, 그 사건을 사고로 조작·왜곡하고, 산 사람과 죽음 사람 모두를 조롱한 권력이 과정 전체를 통해 산 사람에게 죄책감을 덮어씌울 때 과연 누가 거기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죄책감은 피지배집단을 무력화하고 이간시키는 지배집단의 살수다.


살수 죄책감을 어찌 처리할 것인가. 죄책감을 없애면 되나? 안 된다. 거대유일신을 부정한답시고 무신론으로 내달리면 안 되는 이치와 같다. 이영만을 죽인 것이 권력이라고 해서 그 권력을 방조거나 무관심했던 공동체 구성원의 근원적 책임이 면제되지는 않는다. 진실 규명·범죄자 처벌·민주주의 구현을 통해 공동체의 공동체다움을 복구해야 한다. 이영만을 현실 정치경제에 부활시켜야 한다. 이것이 진짜배기 죄책감이다. 진짜배기 죄책감은 죽은 자와 산 자 모두를 비상으로 이끄는 날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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