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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폭발 - 타락
스티브 테일러 지음, 우태영 옮김 / 다른세상 / 201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자아폭발이 만들어낸 새로운 정신에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이 책은 주로 부정적인 측면을 다루지만, 그렇지 않은 측면을 무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특히 그것이 타락 이전의 선조들은 꿈도 꾸지 못했을 방향으로 인류를 나아가게 했으며, 사실은 지금도 우리를 전진하게 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타락이 끔찍한 결과를 낳았음에도 어떤 면에서는 하나의 “도약”이었다는 사실이다. 험한 환경에 대응하여 우리 선조들이 발전시킨 스스로 생각하는 새로운 능력은 선조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발명·창조성·합리성이라는 새로운 능력을 선사했다.(177쪽)
스티브 테일러가 제시하는 긍정적인 측면은 다음 네 가지다.
① 기술 폭발과 체계화
② 새로운 종류의 문명
③ 새로운 종류의 창조성-구성력
④ 인과관계 인식-미신·금기 극복
그 동안 다양한 채널을 통해 우리가 익히 들어온 인류, 정확히는 인도유럽인 문명 예찬과 내용이 겹친다. 여기다 췌언 보탤 오지랖이 필요하겠나. 반대로 두 가지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1) 저자는 말한다. “타락 이후, 예술품의 수준은 저하되는 듯하다.”(184쪽) 다른 연구자들의 견해도 이와 같다. 즉흥성도 자유로움도 우아함도 기법도 쇠퇴했다. 자아폭발, 그러니까 왼쪽 뇌 기능의 오른쪽 뇌 기능 제압이 그 원인이다. 이 상태에서 톨스토이든 도스토예프스키든 베토벤이든 말러든 왼쪽 뇌 기능의 우위를 십분 활용하는 것 말고 다른 방도가 있었겠나. 그 결과가 바로 구성적으로 뛰어난 그들의 소설이며 교향곡이다. 그들의 오른쪽 뇌 기능이 보통사람보다 월등하다 하더라도 달라질 것은 없다. 타락문명이 요구하는 예술문법이 그렇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들을 위대하다 하는 것 또한 타락한 감성이기 때문이다. 과연 그런가?
그렇지 않다. 여기서 예가 된 예술은 저자가 말하는 타락 초월 시대 제2차 물결의 흐름 가운데 있다. 타락 초월 정신이 빚어낸 새로운 창조물이다. 이들은 자아폭발의 긍정적 측면이 아니다. 자아폭발의 어둠이 끝내 삼키지 못한 빛의 발현이다. 육사 문학이 일제 식민통치의 긍정적 측면인가. 일제 식민통치의 어둠이 끝내 삼키지 못한 조선 자주정신의 발현 아닌가.
(2) 인과관계 인식은 불가결하다. 마법적 사고가 낳은 미신·금기로 죽임당한 사람, 망가진 사물, 부서진 사태가 그 얼마인가. 자아폭발이 일으킨 과학이 그 맹목을 걷어낸 것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그 사실 만큼, 아니 더욱 누락 불가한 진실이 있다.
과학의 이름으로, 과학의 힘으로 죽인 사람, 망가뜨린 사물, 부순 사태는 그러면 그 얼마인가. 인도유럽인이 모든 “신대륙”을 침략하면서 과학의 이름으로, 과학의 힘으로 죽인 원주민의 수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 예컨대 인도유럽인이 처음 북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원주민은 줄잡아 6000만 명이었다. 불과 200년 만에 그 숫자는 100만 미만으로 줄었다. 과학의 이름으로, 과학의 힘으로 죽인 것이다. 좀 더 가깝고 직접적인 예를 들어보자. 독일의 과학 발전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유대인 생체 실험에 힘입은 바 크고, 일본의 과학 발전은 731부대 조선인 생체실험에 힘입은 바 크다. 마법적 사고의 맹목과 과학의 맹목은 본질이 다른 것인가.
한 걸음 더 나아가자. 둘 이상의 사람, 사물, 사태가 맺는 관계는 다양하다. 그중 인과관계는 얼마나 될까? 20세기 대표지성 버트런드 러셀에 따르면 20%가 못된다고 한다. 이 말이 진실이라 전제할 때, 인과관계를 통해 규명된 법칙에 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과학은 세계의 관계, 아니 관계로서 세계의 20% 이하를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결정론적 혼돈deterministic chaos으로 가득한 인과관계 너머의 더 큰 세계 앞에서 과학은 무엇인가? 당연히 어둠이다. 과학으로 규명할 수 없음에도 환유하여 그 진실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진실을 가로막는 데서 끝나지 않고 더 큰 마법적 사고 체계를 부양하기도 한다.
신은 존재하는가? 이 질문에 ‘정통’ 과학이 내놓는 답은 ‘없다’다. 이 답은 거대유일신교가 신봉하는 창조주 따위 개념에 대해서는 맞다. 타락 이전 선조들, 타락하지 않은 현존 인류들에게 이 답은 맞지 않다. 내가 말하는 소소 미미한 존재들과 그들이 일으키는 네트워킹인 신 개념에는 더더욱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이 퍼뜨린 통속한 과학적 무신론이 인류 영혼을 파리하게 만들어버렸다. 무엇보다 한심한 노릇은 그 엉터리 무신론이 인류가 만들어낸 최악의 미신인 사하라시아 기원 거대유일신교들을 한층 의기양양하게 만들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저들의 주구 노릇을 대놓고 하는 이른바 창조과학의 미욱함에 이르면 도대체 과학이 미신과 어떻게 다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자아폭발 과학이 여태 드러낸 진실보다 가린 진실이 훨씬 더 많고, 훨씬 더 중요하지 않을까. 자아폭발 과학의 긍정적 측면이란 어쩌면 지주가 소작인에게 허락한 논두렁의 콩 같은 것이 아닐까. 자아폭발의 어둠이 끝내 삼키지 못한 빛의 발현으로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과학을 빚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