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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폭발 - 타락
스티브 테일러 지음, 우태영 옮김 / 다른세상 / 201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기원전 4000년·······당시는 사망률이 높고, 의학적인 치료도 없고, 여러 문제점들은 있었지만 마치 낙원이었던 듯하다. 사실·······이후의 사람들에게는 낙원으로 보였다. 사람들은 신화 속에서 타락 이전의 기간을 황금시대 또는 “완전한 미덕을 갖춘 사람들”이 살았던 시대로 기억한다. 어떤 인류 집단도 다른 집단의 영토를 침략하거나 정복하려 들지 않았으며, 소유물을 훔치려 하지도 않았다.·······어디서나 여성과 남성의 지위는 동등했으며 지위와 부의 차이를 수반하는 계급의 차별도 없었다. 확실히 살기가 힘든 점은 있었다. 특히 원에재배로 전환한 사람들은 살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자연적 조화의 정신, 인간과 자연 사이의 조화, 인간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는 정신이 지구 전체에 충만했던 것 같다.(68-69쪽)
리베카 솔닛은 이렇게 말한다.
“구약성서의 창조주는 폭군적 작곡가다. 그의 악보는 단 하나의 올바른 방식으로만 연주되어야 한다. 불 칼을 든 천사가 인간을 에덴에서 쫓아낸 것은 우리가 뱀과 이야기를 나누고 간식으로 먹을 과일을 잘못 골랐기 때문이었다. 그 뒤 우리에게는 고통과 저주뿐이었다. 그러니 구원은 꼭 필요했다. 모든 것을 측정하는 기준이 완벽이었으니까. 그 기준에 대자면 모든 것이 기준 미달이다.
『창세기』의 영향을 받은 세계 인구 절반이 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우리가 어떤 형태로든 은총을 잃고 타락한 존재라고 믿는다. 세속적인 이야기들조차 그런 얼개를 취하는 경향이 있다. 보수주의자들에게는 그들만의 타락 이전의 에덴이 있고, 그 에덴에는 보통 강인한 아버지들과 조신한 여자들이 있고, 퀴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진보주의자들도 세상이 지금처럼 오염되지 않았던 시절에 대해 늘 이야기한다. 모계사회, 구석기 식단, 치즈에서 의자까지 하여간 거의 모든 것이 장인적으로 제작되었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은총을 포기한다면, 은총에서 타락하는 것도 그만둘 수 있다. 그 대신 완벽하진 않지만 좋은 것들을 즐길 수 있게 된다.”(『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중 <겨드랑이 기름때> 23-24쪽)
그가 스티브 테일러를 읽고 나면 이 글의 논조를 바꿀까?
스티브 테일러의 “얼개”에는 기본 전제인 “은총”이 제거되어 있다. 은총이 제거되면 “타락”도 “구원”도 모두 제거되는가? 우선 구원은 “극복”이라는 인간 스스로의 과업으로 바뀌었으므로 제거된 셈이다. 타락은 어떤가? 스티브 테일러는 은총을 전제하지 않고도 타락이란 용어를 썼다. 이유는 두 가지 정도 추정할 수 있다. 하나는, 성서문화권에서 이 말은 친숙함과 더불어 무의식을 건드려 주목하게 만드는 힘을 지닌다는 사실에 터한 선택이다. 덜 “정확한 용어”(41쪽)라고 하면서도 본제로 삼은 것이 그 근거다. 다른 하나는, 타락이라 표현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문명 전체의 성격이 악하다는 판단에 터한 규정이다. 보수주의자들이 돌아가기를 희망하는 세계, “강인한 아버지들과 조신한 여자들이 있고, 퀴어는 존재하지 않는” “에덴”이 바로 스티브 테일러가 말하는 타락한 문명이다. 타락 말고 더 적절한 용어를 이 맥락에서 찾기란 그리 쉽지 않다. 타락이라는 용어 자체가 문제라면 리베카라는 이름이 창세기에서 온 것은 어찌 하나.^^ 스티브 테일러가 창세기 얼개 일부를 방편으로 취하고 있지만 타락의 요체는 BC4000년 전후한 문명 변화에 대한 사회·인문학적, 생태학적 비판에 터 잡고 있다. “은총을 포기한다면, 은총에서 타락하는 것도 그만둘 수 있다.”는 리베카 솔닛의 타당성은 스티브 테일러를 관통하지 않는다.
결국 관건은 BC4000년 이전 시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다. 은총이란 말은 완벽한 시대라는 평가를 수반하게 마련이므로 은총을 포기하면 완벽은 사라진다. 은총을 포기한 스티브 테일러는 조심스럽게 말한다. “마치 낙원이었던 듯하다.” 그가 제시한 근거를 보면 충분히 수긍할 만하다. 하면, 그 시대로 회귀하자는 말인가. 아니다. 가능하지도 가당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저 “여러 문제점들” 때문이다.
여러 문제점들이란 무엇일까? 인용문에는 높은 사망률, 의학적 치료 부재가 예시되고 있으나 핵심은 ‘마법사고’다. 한 인간의 발달과정에 비유하면 사춘기 이전 특히 영·유아기 단계에 나타나는 문제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자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인과적 법칙에서 벗어난다. 자연 조건에 쉽게 예속된다. 사실 이들은 치명적이다. 계속 안고 살아갔다면 인류는 진즉 멸종했을 가능성이 높다.
깨뜨려야 할 것은 깨뜨려야 한다. 사춘기의 도래는 불가피하다. 부정과 전복을 거쳐 도달한 어른의 세계가 보여주는 진경은 설혹 외양은 아이의 그것과 같다 하더라도 내용은 전혀 다르다. 지식, 지혜, 기품, 도량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다. 이들을 무로 돌리고 이른바 황금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모계사회, 구석기 식단, 치즈에서 의자까지 하여간 거의 모든 것이 장인적으로 제작되었던”이라는 약간의 우스개가 곁들여진 리베카 솔닛의 표현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은 우리가 끝내 이어가야 할, 잃었다면 반드시 되찾아야 할 무엇을 지니고 있다. 완벽한 것들이니 되돌아가자는 뜻이 아니다. 한계와 모순을 받아들인 온전한 존재로서 지녀야 할 숭고를 향해 가자는 뜻이다. 그 길은 되돌아 나아가는 길이다.
되돌아 나아가야 할 참 황금시대는 지식, 지혜, 기품, 도량을 갖춘 초로기 시대다. 지난 6000년은 사춘기 시대였다. 인류역사는 이제 청년기에 진입했다. 파열과 열림, 분리와 일치, 소유와 사랑이 맹렬히 교차하면서 지구 전체를 뒤흔들고 있다. 장년기를 지나 황금기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모른다. 황금기는 얼마나 길까, 그 뒤는 뭘까? 여기부터는 질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