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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 나이듦에 관한 일곱 가지 프리즘
파커 J. 파머 지음, 김찬호.정하린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7월
평점 :
태도를 가다듬고, 영성을 갱신하며, 상처를 치유하고, 상처받은 치유자로서 세상에 돌아가기 위한 안전한 공간이 있다면 그 모든 곳이 성소다. 이는 단지 폭풍우에서 피난처를 찾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생존과 지속해갈 수 있는 능력에 관한 것이다.(190쪽)
토머스 머튼의 말을 들어보자.
이상주의자들이·······가장 쉽게 굴복하는 형태의 현대적 폭력이 만연한다. 행동주의와 과로가 그것이다. 현대생활의 분주함과 압박은 본질적인 폭력성의 가장 보편적인 형태일 것이다. 수많은 갈등사안에 열중하기, 너무 많은 요구에 부응하기, 너무 많은 프로젝트에 관여하기, 모든 일에서 모든 이를 돕기 원하는 것은 폭력에 굴복하는 일이다. 더 나아가, 이는 폭력에 대한 협력이기도 하다. 활동가의 광란은 그의 일을 무효화한다.·······광란은 그가 하는 일의 결실을 파괴하며, 일을 유익한 것으로 만드는 내적 지혜의 뿌리를 죽이기 때문이다.
머튼은 우리의 가장 심오한 요구들 가운데 하나를 거론한다. 일과 삶 자체를 유익한 것으로 만드는 ‘내적 지혜의 뿌리’를 보호하고 양성하기. 영성이라 불리는 원뿌리에서 영양분을 공급받는 우리는 세상에서 도망치거나 그것을 착취할 이유가 없다. 대신 인간 최고의 가능성을 열망하면서, 세상 (그리고 우리자신)의 모든 결점을 끌어안으며 세상을 사랑할 수 있다.
그렇게 살 수 있으려면, 세상을 사랑하기 위한 목적으로 우리 영성을 갱신시키면서, 언제 어디서 안식처를 구할지를 알아야 한다. 내적 지혜의 뿌리를 길러내는 모든 것에서 도움을 받을 때, 행동주의와 과로의 폭력에 의해 왜곡될 가능성도 낮아진다. 이를 이해할 때, 우리는 비폭력-우리 문화의 폭력을 초월하고 변형시킬 기회를 열어주는 존재의 유일한 방식-의 중심을 향해 이동 중이라고 할 수 있다.(192-193쪽)
흠, 오늘은 길게 인용했다. 내친 김에 하나만 더 인용한다. 리베카 솔닛이다.
2006년 정치학자 에리카 체노웨스Erica Chenoweth는 비폭력도 폭력만큼 체제 변화에 효과적인 전략인지 알아보기 위해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비폭력이 오히려 더 낫다는 결과를 얻었다. 인구의 약 3.5%만 가지고도 체제에 비폭력적으로 저항할 수 있고 심지어 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결론에 많은 활동가들이 마음을 빼앗겼다. 한마디로,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 굳이 모두가 우리에게 동의하도록 만들 필요까지는 없다. 우리에게 열렬히 동의하여 기부하고, 운동하고, 행진하고, 체포나 부상을 무릅쓰고, 어쩌면 감옥이나 죽음까지 무릅쓰는 사람들이 얼마쯤만 있으면 된다.·······당신의 생각이 잘 여행하고 있는지에는 신경 쓰지 않고 어디에 도달해 있는지에만 신경 쓰는 것은 변화가 이루어지는 양상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153쪽)
리베카 솔닛의 이 글을 품고 있는 <성가대에게 설교하기> 전체 문맥의 표면적 지향은 오늘 우리 논점과 조금 다르지만 결국 영성이란 차원으로 가면 같아진다. “우리에게 열렬히 동의하여 기부하고, 운동하고, 행진하고, 체포나 부상을 무릅쓰고, 어쩌면 감옥이나 죽음까지 무릅쓰는 사람들”, 그 “얼마쯤”이 우리의 성소니까. “생각이·······어디에 도달해 있는지에만 신경 쓰는 것”이 “행동주의와 과로의 폭력”이므로 “생각이 잘 여행하고 있는지에” 신경 써서 “내적 지혜의 뿌리를 길러내는 모든 것에서 도움을 받을 때” “우리는 비폭력-우리 문화의 폭력을 초월하고 변형시킬 기회를 열어주는 존재의 유일한 방식-의 중심을 향해 이동 중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사실 이상주의 활동가의 “광란”, 그러니까 “행동주의와 과로”를 “폭력”이라 지적하는 일은 쉽지 않다. 광란의 활동가 자신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다 여기므로 폭력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다. 주위 사람은 자격지심 때문에 감히 폭력 운운할 수가 없다. 나는 경계지대에서 오래 살아온 탓으로 이런 상황을 수없이 목도했다. 활동가의 광란은 공동체는 물론 자기 자신까지 파괴하곤 했다. 파괴되고 나서도 많은 경우, “일과 삶 자체를 유익한 것으로 만드는 ‘내적 지혜의 뿌리’를 보호하고 양성하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광란은 이미 일극구조에 중독된 일종의 정신병이기 때문이다.
이 지경의 정신병은 악의 다른 이름이다. 악을 부수기 위해 비-집중 상태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곳이 성소다. “태도를 가다듬고, 영성을 갱신하며, 상처를 치유하고, 상처받은 치유자로서 세상에 돌아가기 위한 안전한 공간이 있다면 그 모든 곳이 성소다.” 성소 공간은 반드시 장소적 공간일 필요가 없다. 사람일 수도 있다. 걷기일 수도 있다. 노래일 수도 있다. 우리를 비대칭의 대칭 상태로 놓을 수 있다면 멸치국수 한 사발도 성소다. 은폐된 폭력, 그 분주한 참여의 해정을 위해 나는 일어나 국수집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