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 나이듦에 관한 일곱 가지 프리즘
파커 J. 파머 지음, 김찬호.정하린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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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업을 했던 아버지가 긴장과 압박감을 어떻게 다루었는지에 대해 들려준 이야기가 떠오른다. 아버지의사무실에는 다섯 개의 서랍이 달린 오른손잡이용 받침대 책상이 있었다. 아버지는 오늘 받은 우편물은 가장 밑에 있는 서랍에 두고, 어제의 우편물은 다시 꺼내 그 위에 있는 서랍으로 옮기면서 일을 했다. 아버지는 가장 위 서랍까지 올라와야만 우편물을 열어봤다. 그 시간까지 사람들이 편지로 쓴 문제의 절반가량은 그럭저럭 해결되었고, 나머지 절반은 편지가 도착하자마자 읽어야 할 만큼 절박하지 않았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116-117쪽)


딸아이 어렸을 때 아침에 잠 깨우기는 내 담당이었다. 내가 깨우면 짜증내지 않고 기분 좋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가령 7시에 일어나야 한다면 나는 6시 55분 살며시 아이 방에 들어간다. 이름 대신 별명을 코믹한 귀엣말로 부른다. 잠결에 대답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어깨를 다독거려준다. 잠시 뒤에 다시 코믹한 어조로 속삭인다. “4분 57초 동안 뒹굴뒹굴~♫” 아이는 행복한 표정으로 이불 속을 파고든다.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콧노래를 부르며 방에서 나온다.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지 않아도 아이들이 이미 안다. 그럼에도 99%의 엄마는 “학교 가야지!” 한다, 이불을 훌떡 걷는다, 커튼을 열어젖힌다. 이런 언행은 비단 “긴장과 압박감”만 유발하는 게 아니다. 짜증까지 함께 유발한다. 더없이 나쁜 방법이다.


더 준 5분도 아니고 그나마 3초를 떼어먹힌 4분 57초가 아이에게 긴장과 압박감을 유연하게 다루는 절묘한 틈이 되어준다. 이것은 파커 J. 파머의 아버지가 유예한 5일과 본질이 같다.


살면서 우리가 느끼는 긴장과 압박감은 많은 부분 과장되거나 심지어 헛된 것이다. 이런 긴장과 압박감이 지속되고 누적될 때, 삶은 우리가 이끄는 무엇이 아니라 우리를 끌고 가는 무엇이다. 삶을 자기 스스로 이끌려면 나름대로 "다섯 개의 서랍"을 준비해둬야 한다.


나는 ‘작심삼일 마법’을 쓴다. 집에 불이 난 경우가 아닌 한, 결정 내리기 어려운 거의 모든 일 처리에 작심하고 사흘의 말미를 준다. 문제가 있다는 사실만 기억에 넣어둔 채 사흘 동안 뒹굴뒹굴 하면 스스로 답을 찾아내리라 믿고 맡기는 것이다.


사실 이 방법은 우울증 치유상담 과정에서 발견했다. 우울증에는 결단을 미루고 미루는 증상이 대부분 수반된다. 결단 못하고 쩔쩔맬 때 그 방법을 가르쳐준다고 해서 결단할 수 있다면 이미 우울증이 아니다. 압박감이 발끝을 태우고 들어와도 꼼짝할 수 없는 게 우울증이다. 이 상황에서 내가 먼저 아픈 사람한테 제안한다.


“사흘 뒤로 미루세요. 시간에 맡겨놓고 싹 손 터는 거예요. 뒹굴뒹굴 하고 나면 답 나와요. 안 나오면 한 번 더 미루세요, 까짓것!”


시간에 맡긴다 하지만 내면에 감춰진 큰 자신에게 맡기는 것이다. 자기부정증후군을 녹이는 비대칭의 대칭법이다. 대놓고 미루게 함으로써 마음의 짐을 더는 한편 사흘의 시한을 둠으로써 마냥 미루는 병증의 덜미를 낚아채니 말이다. 우울증의 여진이 얼마간 남아 있는 나는 일상에서 수시로 이런 일을 벌인다. 간지 쏠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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